(Photo : )  엘파소 한인 제일 침례 교회 이상환 목사
(Photo : ) 엘파소 한인 제일 침례 교회 이상환 목사

문제 제기: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 1:15)"

 

위의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구절로써 '예수님께서 창세 전 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에 피조된 피조물'임을 논증하기 위해 빈번히 사용하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피조되었다는 것을 계시하는가?

단어의 차이: 잠시 눈을 비비고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보라.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피조(Πλαστος)된 이시니"라고 되어있지 않다.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창조(τεχνητός)된 이시니"라고 되어있지도 않다.

그대신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πρωτότοκος)이시니"라고 되어있다.

위 구절은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피조(Πλαστος)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먼저 창조(πρωτότοκος)되셨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먼저 나신(πρωτότοκος) 것이라고만 말한다.  피조와 창조는 먼저 나다는 단어와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확연한 의미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예수님의 피조됨과 창조됨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1]

먼저 나시다: 그렇다면 "먼저 나셨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프로토토코스(πρωτότοκος)라는 헬라어에서 번역된 이 단어는 전치사 프로(πρό)와 동사 틱토(τίκτω)의 합성어이다.  프로(πρό)는 '시간적으로 먼저'라는 의미이고, 틱토(τίκτω)는 'A라는 공간으로 나오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철수가 영희보다 프로토토코스(πρωτότοκος)했다" 함은 철수가 영희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A라는 공간으로 나왔다는 의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단어를 가지고 철수가 영희보다 먼저 피조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영희가 철수보다 먼저 피조되었지만 철수보다 뒤늦게 A라는 공간으로 나왔을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겠다.  틱토(τίκτω)는 엄마의 뱃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현상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창조나 피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엄마의 자궁속에서 있던 아이가 세상에서 나왔다는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이 단어에는 창조나 피조의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 보다 프로토토코스(πρωτότοκος) 하신이"라는 구절로 예수님께서 피조가 되었는지 창조가 되었는지를 운운할 수 없다.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시간적으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A라는 공간으로 나오셨다'는것 뿐이다.

예수님께서 나오신 공간 A: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피조물보다 먼저 나오신 공간 A는 어디이고, 나오시기 전에는 어디에 계셨나?  우선 예수님께서 나오신 공간 A부터 알아보자.

위의 구절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는 하나는 예수님께서 나오신 공간은 피조물이 나온 공간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피조물보다 먼저(πρό) 나오셨다"는 의미는 그 분께서 나오신 공간이 피조물이 나온 공간과 같은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위에서 알아보았듯이 프로(πρό)라는 전치사는 '시간적으로 먼저 나오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전치사가 쓰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피조물이 나온 공간에 먼저 나오셨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차후에 예수님께서 먼저 나오신 공간으로 피조물이 나왔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순서로 예수님과 피조물이 나온 공간을 알고 있다.  그곳은 세상이다.  예수님께서는 피조물보다 먼저 세상에 나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먼저 나오심을 성육신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피조물보다 먼저 나오신 사건이 아니라, 피조물이 나온 후에 나오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에는 메타(μετά)나 카타(κατά)가 사용되야지 본문처럼 프로(πρό)가 사용될 수 없다.  그래서 이 구절을 성육신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나오시기 전에계셨던 곳은 어디인가?  요 1:18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계셨던 곳을 명확히 계시한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품 속에 계셨던 것이다.  그 품 속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품 밖으로 나오사 삼위일체의 제 이격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런후 성부와 성령과 함께 피조물들을 창조하사 피조물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세상으로 나오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골 1:15가 증거하는 예수님과 피조물사이의 다른 점인 것이다.  요 1:2~3절도 이를 확실하게 증거한다.

"그[예수님]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성부의 품에서 독생하시던 예수님께서 그 품에서 세상으로 나오사 삼위의 제 이격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무(無)에서 유(有)가 아닌 유(有)에서 유(有):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보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부의 품 속에서 나왔다'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비유나 상징으로 이해하여 예수님의 창조됨과 피조됨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요 1:1은 예수님께서 성부의 품 속에 존재하셨음이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고 계시하기 때문이다.  요 1:1을 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문장을 헬라어로 보면 "말씀"과 "하나님" 앞에 각각 정관사가 붙어있다: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그리고 두 인격체가 존재동사인 엔(ἦν)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에 '함께 있다'는 전치사 프로스(πρὸς)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말씀이라는 존재가 성부께서 실체하시는 것처럼 그분과 함께 실체하고 계셨음을 계시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창조될 피조물로 계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문자적으로 실체하시듯이 말씀께서도 그렇게 실체하셨다는 말이다.  그 밖의 다른 해석은 절대 만들어 질 수 없다.  정관사의 의미와 동사의 역할, 그리고 전치사의 사용법등의 문법적 의미들을 무시하지 않고서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 질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품속에서 독생자로 실체하고 계셨던 것이다.

서로를 포함하고 계신 성부와 성자: 요 14:11은 보다 더 입체적으로 위의 사실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이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만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게 아니라, 아버지께서도 예수님 안에 거하신다.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포함(예수⊂성부)되고, 성부께서도 예수님께 포함(예수⊃성부)된다"이다.  두 개의 다른 집합이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의 경우 뿐이다.  서로 같을 때이다.  즉 성부와 예수님께서 같은 하나님(성부=하나님=예수님)일 때에만 서로를 포함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두 분의 위(位)가 같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속성(體)이 같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사용되는 단어가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아니던가?  예수님께서 성부 안에 계시듯이 성부 께서도 예수님의 안에 계실 수 있는 이유는 둘은 다른 위이지만 같은 체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나도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내 안에 계시지 않는가"묻는다면 위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도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내 안에 계시다"는 표현은 물론 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표현과는 다른 의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부을 온전히 포함하고 계시듯이 성부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포함하시되 온전히 포함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부와의 관계는 (1) 예수⊂성부, (2) 예수⊃성부, (3) 예수=하나님=성부로 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1) 우리⊂하나님으로는 표기될 수 있지만 (2) 우리⊃하나님으로는 표기될 수 없으므로 (3) 우리=하나님=성부나 (4) 우리=하나님=성자로 표기될 수 없다.

그렇다.  예수님과 성부는 서로를 온전히 포함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온전히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과 밖에 동시에 충만하시다.  마치 물은 물고기의 안과 밖에 동시에 충만하지만 물고기는 물에 대하여 그러지 못하고, 공기는 새의 안과 밖에 동시에 충만하지만 새는 공기에 대하여 그렇지 못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과 밖에 동시에 충만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결론: 정리하자.

첫째,
예수님께서 나오신 A라는 공간은 세상이다.
피조물이 그 후에 나온 A라는 공간도 세상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나오시기 전에 계셨던 장소는 성부의 품이다.
피조물이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있었던 장소는 무(無)이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나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품속에서 실체(實體)하고 계셨다.
피조물은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상재(想體)하고 있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유(有)에서 유(有)로 나오셨고,
피조물은 무(無)에서 유(有) 나왔다.

고로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는 골 1:15 말씀은 예수님께서 피조되셨거나 창조되셨다는 주장을 지지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1] 만약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만들어진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헬라어중 하나가 쓰였을 것이다: Πλαστος, τεχνητός, φανταστικός, ανύπαρκτος, τεχνητός, αυτοδημιουργητός, αυτοδημιούργητος.  그러나 이 많은 헬라어 중에서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그대신 "먼저 나셨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πρωτότοκος가 쓰였다.

[출처: 이상환 목사 홈페이지 ,http://sanghwanl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