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정서에는 일본 하면 분노가 치미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수탈과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 경기는 져도 일본과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만 속이 풀릴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서 배울 것도 많다. 일본인 가운데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스기하라 지우네’이다. 그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교관을 꿈꿨다. 와세다 대학교 고등사범부를 중퇴했다. 꿈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 결국 오랜 소망을 이루었다. 그는 외교관이 되어 러시아의 서쪽에 있는 리투아니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 집 공관 앞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해!” 그는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성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순간 그의 눈에는 유대인들이 들어왔다.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을 피해 폴란드의 거친 지형을 헤치고 결사적으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생사를 걸고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 만약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그곳에서 스기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비자를 받으면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럽으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기하라는 즉시 본국에 전보를 쳤다.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 급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전보를 쳤다. 그러나 동경에서 날아오는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세 번 모두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순간, 그의 눈앞에는 두 가지 광경이 그려졌다. 외교관으로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유대인들이 독일군에 끌려가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 두 그림 중 어느 그림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앞날을 챙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처량한 유대인들을 도울 것인가? 결국 뜬눈으로 하룻밤을 꼬박 세웠다. 정말이지 지겹도록 지루하고 기나긴 밤이었다.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일찍 대사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결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28일 동안 그는 손수 비자를 쓰고 도장을 찍었다. 밤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그는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본국인 일본 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소신껏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도록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그의 위대한 결단으로 유대인 6천명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뒤에 벌어질 광경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외교관 지위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이다. 그 덕분에 그는 평생 전구를 팔면서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가장 옳은 일을 했다.”

그는 일본대사를 내려놓았다. 출세와 성공의 길을 포기했다. 대신 하늘나라 대사직을 거리낌 없이 수행했다. 스기하라와 그의 가족들은 한 번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역시 자랑스레 말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셨을 때 아버지는 옳은 일을 택하셨으니까요.”

1969년. 마침내 그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85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드바셈상을 수상하고 ‘열방의 의인’으로 칭송받았다. 현재도 예루살렘 언덕에는 그 당시의 표창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이다.

스기하라는 옳은 일을 위해 편한 삶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누군들 편한 삶이 싫겠는가? 평탄한 삶을 차버릴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누구나 걸어가는 당연한 길을 스스로 포기했다.

주변의 강요에 의한 억지 선택이 아니다. 당연히 고민은 됐다. 갈등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편함보다는 옳은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 믿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다가올 피해가 두려워 은근슬쩍 넘어가고,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편히 살기 위해 슬쩍 눈감아버리는 우리네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 검은 돈 때문에 옳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내모는 사회. 뒷거래를 하면서 악한 사람을 죄 없는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법정. 조금 빠른 길을 가기 위해 스스럼없이 법을 어기는 세상.

양심도 법도 돈 앞에는 무기력한 사회가 아니던가. 정의도 진리도 이권 앞에서는 무색해진 세상이 아니던가. 의리를 핑계삼아 악한 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둘이던가? ‘딱 한번만!’ 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미 다음번도 예약한 셈이 아닌가? 악은 과단성 있게 끊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는 법이니까.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할 있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하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영적인 자유가 필요하다.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켜도 괜찮지만, 옳은 일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기다려지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