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에서 그 분들의 삶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담임)가 처음 고려인들을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가 흘렸던 눈물만큼이나 그의 고려인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북한선교와 중국선교에 전념하고 있던 그가 처음 고려인선교를 시작한 것은 1999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고려인선교를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 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된 것”이라고 간증한다. 그래서일까, 일단 고려인선교를 시작했을 때 그는 마치 오랫동안 고려인선교를 준비해 왔던 사람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99년 당시 남서울은혜교회에서 파송한 러시아 선교사가 고려인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홍 목사에게 호소해 왔다. 홍 목사는 그때까지도 고려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러나 선교사로부터 고려인들의 딱한 사정에 대해 전해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직접 연해주로 가게 됐다.

당시 연해주에는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쫓겨 갔다가 1990년대 소비에트 연맹의 해체와 함께 또다시 박해를 받고 연해주로 돌아온 8만여 명 정도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대가 철수한 자리에 남겨진 막사를 터전삼아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홍 목사가 “영하 20~30도 추위였는데 문짝이 없어 휘장으로 대신하고 유리창은 비닐로 대신하고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고려인들에게 뭐가 필요하냐고 물으니 너무 춥다고 했습니다. 백열등을 모아 거기에 망을 씌워서 이불 속에 넣은 것이 그들에겐 최고의 난방기구였습니다. 일단 전구부터 있는대로 다 사줬습니다.”

추위는 둘째 치고, 식량이 더 큰 문제였다. 식량 배급과 유통이 끊어진 상황에서 식량을 마련할 길은 도저히 없어 보였다. 홍 목사가 식량 공급안을 구상하던 차에 고려인들이 감자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감자 농사가 가장 쉽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봄, 감자 농사가 시작됐다. 처음엔 형편없던 수확이 얼마 후엔 5백 톤, 1천 톤, 2천 톤까지 점점 늘어나, 생산한 감자를 북한 동포들에게 열차 20칸이 넘게 보낼 정도가 됐다.

▲한 고려인 가정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다. 이제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립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수확 후 고려인들은 3만~4만 불의 수입이 생겼다. 당시 교수 봉급이 140불이었으니 큰 돈이었다. 그 마을에서는 감자 농사를 짓는 고려인들이 가장 부유한 삶을 누리게 됐다. 처음에는 자금을 다 대줬지만 점차 자립하게 됐고, 이제 그들이 또 다른 고려인들을 도와주게 됐다.

고려인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됐다 싶었을 때 홍 목사는 문화선교에 눈을 돌렸다. 2003년 그는 테너 최승원, 이동현, 바리톤 우주호 씨 등을 초청해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에는 러시아 상류 계층의 인사들도 많이 참석했고, 이들은 음악을 통해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됐다. 자연히 선교에 있어 이들의 지지도 따라왔다. 홍 목사는 “보통 선교는 저변부터 하지만 문화접근이라는 것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전한다.

한편 홍 목사는 고려인들은 물론이고,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는 러시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선교도 시작했다. 2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한 국제학교는 소수의 학생만을 받지만, 러시아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교 중 하나가 됐다고 한다. 이곳의 교사들은 선교를 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있으며, 어려운 형편의 선교사 자녀들에게는 장학혜택을 주며 교육하고 있다.

홍 목사는 이외에도 장애인 학교, 고아원, 노인병원 등에 대한 지원 사역과, 마약, 알코올 중독환자들에 대한 치유 사역을 벌이는 등 고려인사역의 저변을 확대시켜가고 있다. 또 교회가 없는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교회가 없는 마을이 하나도 없도록 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