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주인을 잃은 제자들은 겁에 질려 줄행랑을 쳤다. 실의와 충격에 휩싸여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중 어떤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 분으로부터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 영광에 들어감으로써 구약의 말씀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식사를 할 때 자신들을 축복하시고 떡을 나누어주시는 것을 보고 비로소 예수님임을 깨달았다(눅 24:13-32). <엠마오에서의 식사(판화, 1654년작)>는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 그들이 만난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깨닫는 감격적인 순간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림의 무대는 허름한 숙소다. 주위엔 식탁 외에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다.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게끔 의도적으로 복잡한 기물배치를 멀리했다. 렘브란트 특유의 단순하고 간략한 구도를 엿볼 수 있다. 젊은 시절 그가 바로크풍의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구성법을 즐겨 사용하였다면, 중년에 제작한 이 작품은 군더더기를 빼고 정말로 들어가야 할 이미지만을 선별적으로 기용하여 작품의 요점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회화적 풍부성’을 잃지 않는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에는 네 인물이 등장한다. 화면 중앙의 그리스도를 비롯해 좌우에 각각 제자 한 명씩, 그리고 하단에 시중드는 아이가 눈에 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신 떡을 떼는 순간 심령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만난 분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있다. 우측의 제자는 예상치 못한 만남에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며 움찔하는 포즈이고, 좌측의 제자는 순간적으로 예수님에게 경배하는 자세를 취한다. 동시에 그 제자는 감사와 기도를 올리고 있으며 자신이 그토록 섬겼던 신앙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의심의 뿌연 안개가 걷혀지고 마침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속자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 주의를 모으는 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역대의 화가들이 예수님을 숱하게 그려왔지만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님은 특별하다. 여기서 ‘특별하다’는 말은 그가 예수의 얼굴을 미화하거나 포장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이미지는 영웅적인 서사시에 등장하는 어떤 위인이 아니다. 그가 의지한 것은 딱 하나, 성경 뿐이었다. 그 분은 이사야의 기록처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게(사 53:2)’ 묘사됐다. 1648년에 제작된 유화 <엠마오에서의 식사>를 보면 그런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짧은 수염, 둥그런 눈, 헝클어진 머리카락, 수척한 몸, 소탈한 복장, 렘브란트가 묘사한 예수님이 너무나 평범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많은 화가들이 그동안 예수님의 외모를 미화하는 데 집착해 왔다. 하지만 이 그림의 그리스도는 비잔틴이나 르네상스 시대 ‘미소년 타입의’ 그리스도가 아니며, 중세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귀족풍의’ 그리스도, 반종교개혁시대의 미술가들이 그린 ‘영웅’도 아니다. 종전에는 그리스도의 ‘고운 모양’과 ‘풍채’를 빼놓는다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오인했다. 그러나 외모가 아니라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진짜 모습이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예수님을 순전히 인간적으로만 형용한 것만은 아니다. 그림에서는 그리스도 주위로 광채가 나는데, 그 광채란 예수님의 신성을 알리는 표시다. 하늘의 광명한 빛이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그 빛이 지금 예수에게 임했을 것이라고 렘브란트는 상상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빛의 본체가 그리스도이므로 ‘옷을 입은 것처럼 빛을 발하시는(시 104:1)’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시며,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드리워지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요 평강의 광휘가 임재하고 있다. 그런 빛을 보고 어떤 미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비정상일 것이다.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히 5:7)’을 흘리시다가 ‘하늘 보다 높이 되신 자(히 7:26)’로 형용된다. 그 위엄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렘브란트는 광채를 이용했다. 실제적 사실과 신비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며 그러면서도 부활한 그리스도의 엄위로우심을 전달하고 있다. 화면 중앙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건과 거룩이 실려 나오게 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평범 가운데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낄 수 있으며, 온유 가운데 ‘초월적인 거룩’이 흘러나온다. 오토박사(Dr.Otto)가 기술했듯 하나님 안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엄위로운 거룩함(majesty-holiness)’이 느껴지도록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도저히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두려운 위엄’, ‘절대적 압도성’과 같은 개념이 드러나도록 했다.

같은 제목으로 제작한 1648년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것과는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 강조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자(행 3:14)’의 특징을 더 강조하려고 했다. 하기는 부활하기 전의 그리스도를 부활한 후의 그리스도와 똑같이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점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이 판화는 빛의 광채도 더 넓게 퍼져 나가게 세심히 배려했다. 전작에서는 제자들이 단순히 놀라는 것으로 묘사했으나, 이번에는 기도와 경배하는 것으로 바꾸어 예수님을 대하는 반응에 ‘믿음의 요소’를 더하였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렘브란트의 신앙이 그만큼 성숙해졌고 단단해졌다는 표시가 아닐 수 없다.

렘브란트는 그가 마치 엠마오에 있었던 것처럼 그 장면을 재현했다. 기가 막힐 정도의 기량이고 경탄할 만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렘브란트는 사실주의에 바탕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영적인 통찰력을 지닌 화가였다. 영적인 통찰력이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생애를 감명깊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손의 화가’가 아니라 모세 시대에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막과 성물을 만든 브사렐과 같은 ‘신령한 예술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리하면, 렘브란트의 그림이 감명을 주는 것은 그가 뛰어난 화가이기 전에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들었고, 만났기 때문이리라. 영적인 통찰을 지니지 못했다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활의 신앙이 결국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켰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