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사회적인격’ 또는 ‘외적인격’을 뜻합니다. 이는 한 개인이 주변세계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여러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페르소나는 개인의 고유한 심리구조와 사회적 역활에 대한 요구간의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사회적인 요구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인터페이스(interface) 역활을 합니다. 특히 유교적인 체면문화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하는데 긴요한 방어기재중의 하나입니다.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섬기는 목회자에게도 본인이 원하든 원치않든간에 일정부분 인격적인 페르소나, 지적인 페르소나, 권위적인 페르소나, 영적인 페르소나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치 코미디언들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도 관중들앞에서 개인적인 슬픔을 표현하지 못한채 주어진 배역을 즐겁고 유쾌한 표정으로 연기해야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앞장서서 섬기는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될 수록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때로는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애도의 뜻을 표하는 페르소나를 쓰고 사랑하는 교우의 임종예배를 방금 마치고 나서는 태연히 기쁨에 겨워하는 페르소나를 쓰고 다른 교우집에 가서 생일잔치를 축하하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개개인이 아버지답게, 목회자답게, 교사답게, 또는 직장상사답게 각자 맡은 사회적 역활을 감당하기 위해서 쓰는 페르소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해주는 윤활유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중에 태어나서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현실속에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눈물을 쏟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짓누르면서 억지로 웃기도 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배우처럼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삶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쓰는 페르소나는 우리개인의 고유한 인격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페르소나는 사실 진정한 자기 자신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투사된 나의 겉모습일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하는 참나와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쓰는 페르소나가 조화롭지 못하면 심리적인 갈등을 겪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페르소나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믿는다면 진정한 자기자신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마치 배우가 맡은 배역을 자기자신으로 착각하면서 산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끝내는 자아가 없는 공허한 삶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명망의 정도가 높을 수록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연예인들의 자살사건은 이러한 경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약점이나 치부를 의도적으로 가리거나 명예를 얻을 욕심으로 쓰는 위선적인 페르소나입니다. 화려하고 멋진 페르소나를 쓰기 위해서 사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내어 기도하고, 슬픈 얼굴로 하면서 주기적으로 판에 박힌 금식을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마6장). 물론 페르소나는 상처받기 쉬운 세상에서 피부나 옷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덮어주는 역활을 합니다. 그래서 페르소나가 진정한 내 자신과 정직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참된 내 모습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으로 드러 난 페르소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깊숙한 내면세계의 진정한 내 자아에게 말씀하십니다(삼상16:7). 하나님앞에서는 누구든지 아무리 아름다운 페르소나라 할지라도 벗어 던지고 민낯으로 나아가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이 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이 입고 있던 옷 그대로 골리앗과의 전투에 임했을 때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보다 진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고 민낯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Who we are보다는 What we are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