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감각의 시대라고 한다. 내면의 깊은 묵상이 상실되고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감각적 문화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교회는 어떤가? 한편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 시청각 예배라든지, 혹은 화려한 조명과 음악을 예배에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감각적 예배가 거룩을 체험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독일보에서 주1회 연재하는 주인돈 신부의 칼럼 <감각, 영성 그리고 초월>은 하나님이 주신 감각이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게 하는 신앙의 매개체라고 주장한다. 이 글은 진정으로 깊은 신앙과 영성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만남이라는 기초 위에 적어도 현대인들보다 수천년 전부터 하나님을 섬겨 왔던 신앙인들이 감각을 통해 어떻게 예배해 왔는지를 전통적, 성서적 측면에서 조명하고 우리도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감각으로 만나게 이끌어 줄 것이다. <편집자 주>

감각과 영성 그리고 초월의 하느님(1)
향(1): 하느님, 냄새가 납니다.
경계의 상징으로서 향(냄새)

냄새가 난다. 코끝을 통하여 은은히 그러다가 진한 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바람결에 실려 가는 /저의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를 따라 /그대여 /천천히 제게로 다가와 /사랑의 창문을 열어주오." 유응교는 "라일락향기"라는 시에서 이처럼 말했다. 향은 조용히 소리없이 다가와 내 후각을 자극하더니 온 몸을 일깨우고 이내 ‘생명의 창, 사랑의 창’을 열게 하는 것 같다. 나는 가능한 밤 열시 TV 뉴스를 볼려고 노력을 한다. 뉴스를 보기 위하여 소파에 앉아는데 조금 있다가 소파 뒤에서 아름다운 향이 나는 것이었다. 향의 근원을 확인하였더니 아내가 라일락 꽃 가지를 꺾어다가 꽃아 놓았다. 앤드 테이블 위에 있는 라일락 향기 덕분에 그날은 뉴스보다도 고등학교 때에 보았던 오페라, 마스카니가 작곡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오렌지 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의 멜로디가 떠오르게 하고, 아름다운 꽃을 가꾸고 만지는 아내가 더욱 예쁘고 사랑스럽게 느끼게 되며, 라일락 향기가 내 온 몸의 감각을 일깨운 밤이었다. 그날의 주요 뉴스가 무엇이었는지 몇 일이 지난 지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은 라일락 향기가 그날의 뉴스로 나에게 기억이 되었다. 라일락 향기는 나로 향(香)을 찾아 향(向)하게 하고 그 향(香)에 취해 포도주의 향음(饗飮)으로, 삶의 축제를 향유(享有)하게 이끌었다.

공간의 경계

하느님은 향을 주셨다. 그 향에 취하게 하셨다. 향은 우선 경계(境界:thresholds)의 속성이 있다. 향은 향이 있는 공간과 없는 공간을 구분하게 한다. 향을 통하여 내가 어디에 들어가는지를 알게 한다. 꽃집에 들어가면 꽃향기가 가득하다. 빵집에 들어가면 빵의 구수한 냄새가 난다. 커피 집에 가면 커피향이 가득 흘러나온다. 나는 지금도 스타벅스나 던킨 도넛의 커피 향보다 캐나다의 커피타임의 커피 향을 더 좋아하고 기억한다. 한국을 떠나 처음 외국 땅인 캐나다에 살 때 그 커피타임의 커피 한 잔과 보스턴크림의 도넛은 토론토의 긴 겨울 육 개월을 이겨내게 해주었던 공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다윗 회장이 늘 건네주었던 그 커피타임의 원두커피로 인해 오랫동안 길들여진 커피 맛이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세미나에 참여하고 올 때,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면 된장찌개 냄새는 영락없는 나의 사랑하는 한국집이며,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나를 위하여 대개 된장찌개를 준비해주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기다려주는 집임을 느끼게 해준다. 향은 공간의 경계를 알려준다.

시간의 경계

향은 시간의 경계를 알려준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아침의 상쾌하고 신선한 경계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커피맛과 같은 신비한 하루의 시작을 알려 주는 경계의 향이다. 저녁 시간에 아내가 부엌에서 요리할 때면 그 냄새가 이층 방으로 올라가고, 그 음식 냄새 때문에 아이들이 ‘엄마 밥 언제 먹어?’를 외치게 하는 경계의 향이다. 삽겹살을 교우들과 함께 맛있게 주일 저녁에 구워먹고 난 뒤, 그 다음날까지도 집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삽겹살 냄새가 나는 것을 경험하며 함께 먹고 마시고 즐겁게 했던 삶의 지경으로 냄새는 다시 인도한다. 나는 봄날이면 꽃 향기 때문에 소년처럼 향을 찾아 기뻐하지만 그 향 때문에 동시에 괴롭기도 하다. 바로 알레르기문제다. 잔디를 갂을 때면 그 잔디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그 후엔 어김없이 연속 재채기를 해댄다. 바로 냄새가 나의 삶의 시간의 경계, 계절의 경계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경계

잡지나 주일날 신문 광고전단에 보면 향수회사가 선전하는 향수전단지가 있다. 향수전단지를 보면 보통은 열고 냄새를 맞게 한다. 바로 향은 경계를 요구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냄새를 맡도록… 그러나 향수 전단광고가 노리는 것은 단순히 그 경계만이 아니다. 그 냄새를 맡고 기분 좋아지고 그 냄새가 우리들의 잠재의식 깊숙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향수를 고르고자 할 때, 잠재의식의 경계로까지 내려간 냄새를 일깨워 그 향수를 사도록 하는 경계선전략이다. 그래서 냄새는 단순한 경계만이 아니라 잠재의식의 경계로 내려가기도 한다.

4월 말에 어느 목사님 집에 초대를 받아 저녁모임이 있어 멀리 교외 길을 운전하게 되었다. 농장지대에 들어서면서 봄을 맞아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고, 그리고 주변에 축사가 있어 동물들 분비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땅과 거름이 범벅이 되어 스며드는 대지의 봄기운과 냄새, 그 냄새는 비록 지금 내가 서있는 땅이 다르고 냄새의 재료도 다르지만, 내 고향 강화의 봄, 농사를 준비하는 봄철의 갈아 엎고난 뒤의 그 땅의 냄새를 기억하도록 하여 주었다. 흙냄새, 거름 냄새는 지금 이 시간으로부터 그 옛날, 그 공간으로 나의 잠재의식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거룩한 시공간의 경계로의 초대

절에 가면 금방 절 냄새가 난다. 절에서 피우는 향 냄새 때문이다. 그 향냄새는 계곡의 산사로부터 바람을 타고 흘러나온다. 교회에서도 향을 피운다. 전통적인 교회의 예전에서는 언제나 향을 사용하였다. 동방정교회, 천주교회 그리고 성공회에서도 향을 사용한다. 어떤 루터교(ELCA)에서도 향을 가끔 사용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난 뒤에 성막을 짓도록 하셨다. 그리고 구체적인 규정을 주시는데 성막 앞에 분향단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향기로운 향을 피우라고 명령하셨다.(출애30;1-10) "너희는 향기로운 향을 야훼 앞에서 대대로 항상 피워야 한다."(출애30:9) 바로 분향단은 성막 입구에서 경계, 곧 "이곳은 거룩한 장소, 하느님의 현존의 장소"를 알려 준다. 부활절이 되면 보통 교회에서 백합꽃을 제단과 교회에 장식한다. 백합꽃을 보고 사람들은 사순절이 끝나고 또한 동시에 부활절이 되었음을 금방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백합향이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이제는 광야의 사순절 여정이 끝나고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봄의 계절에 부활의 축제를 지킵시다’하고 경계의 향을 피워주는 것이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동네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소나무, 전나무 등을 파는 곳이 있다. 요즘은 플라스틱으로된 인조 성탄나무를 많이 하지만 진짜 성탄나무는 역시 소나무, 전나무인것 같다. 특히 내가 경험한 발삼 전나무(balsam fir tree)는 그 향이 아름답다. 진짜 생나무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집 안에 세울 때에, 또는 교회 안에 세울 때에, 아니면 전나무로된 성탄 화환을 걸어 놓을 때에 소나무, 전나무에서 나오는 송진향이며 솔잎에서 나오는 향은 겨울의 차가움 속에 싱그러움을 더해 주는 짙은 향이 있다. 송진 향, 소나무 향은 성탄절임을, 성탄절을 축하하는 공간임을 말해 준다. 향으로 공간을 가득 채워 다른 경계의 공간을 선언하고 다른 경계의 계절이 왔음을 조용히 선전한다. 세상 어디서나 거룩한 장소에는 거룩함을 인식하도록 하는 향을 사용하였다. 향은 거룩한 공간으로의 경계를 통해 거룩한 시간으로의 넘어가는 경계이며, 성속일여(聖俗一如)로의 초대이며 거룩한 현존을 체험하도록 드리워지는 매개체이다.

요한복음12장을 보면 마리이라는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 앞에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 드린 내용이 나온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고 성서는 전한다. 공간을 아름다운 향으로 가득 채웠다. 예수님은 그 비싼 향유 냄새를 인정하시고 기뻐 받으셨다. 그런데 그 향유냄새는 그 공간에서 예수님의 시간을 구분하는 경계로 넘어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다시 말하여 그의 삶이 이제부터는 보통의 사목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으로 들어가는 경계를, 즉 죽음으로 들어가는 경계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마르코14장)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냄새가 되도록 요청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We are the aroma of Christ...:고린토후서 2:15) 그런데 사도 바울로도 그 향의 경계를 이야기 한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받을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지만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2;16) 같은 향기인데 누구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고, 누구에게는 죽음의 역겨운 악취가 된다는 것이다. 향를 통한 경계가 그어진다. 그러면 나는 오늘 누구에게 생명의 향기가 되고, 또 누구에게는 악취가 될까?"아마도 그것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사도 바울로는 다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라고 했다. "하느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