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0월 28일, 질레트(P. L. Gillett) 선교사의 주도로 서울 유니온회관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청년’이라는 단어가 생긴 이날이 바로 서울YMCA가 시작된 날이다.

서울YMCA는 초기, 한국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개화자강운동과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다. 특히 일제시대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했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국내외 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던 2·8 독립선언은 특히 서울YMCA와 관계가 깊다. 1906년 서울YMCA가 부총무였던 김정식을 파견해 재일본 한국YMCA를 창립했고, 당시 재일본 한국YMCA회관은 재일유학생들의 집회와 토론의 장이 됐다.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가 이곳에서 1919년 1월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운동을 결의했던 것이다. 당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2·8 독립선언 실행위원 10명 중 백관수, 송계백, 김도연 등이 재일본 한국YMCA 멤버들이었다. 이들 중 백관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은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외의 지도부 멤버들은 사후처리를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일깨우며 3·1운동을 이끌어 냈다.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서울YMCA와 관련된 인사는 정춘수 최성모 오화영 박희도 박동완 이필수 양전백 이갑성 이승훈 등 9명이나 됐다.

3·1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돼야 했기 때문에 서울YMCA가 직접 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양심과 판단에 따라 기독교 인사들은 16명이나 참가했고, 그 중 9명이 서울YMCA 멤버들이었던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에 들지는 않았지만 당시 서울YMCA 대표였던 이상재는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다수가 폭력적인 방법을 지지했지만, “살육하는 것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는 말로 무저항·비폭력의 방법을 제시했다. 당시 이상재는 “뒤에서 할 일이 많으므로 (독립선언서에)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세운동이 종료됐을 때 나서서 일할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이밖에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던 최남선은 선언서에 기독교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인했다. “나의 사상에서 기독교적 요소를 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 독립·자유·정의·평등이라는 개념이 기독교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는 현재 YMCA 명예총무인 전택부가 지난 1957년 최남선을 찾아가 직접 들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