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북한 사랑,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평양 사랑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평양대부흥 1백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를 평양에서 열겠다는 교계의 꿈은 과연 얼마나 큰 성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가 흔히 북한을 도울 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든다. 북한 주민들은 마치 강도 만난 자와 같으므로 남한의 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주고 주막에 데려다 주고 돈을 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노력들은 이 비유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한국교회가 북한에 막연히 퍼주는 모습은, 마치 강도가 다 빼앗고 버린 자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그를 다시 강도의 주막에 맡기는 것과 같다. 강도 만난 자는 더 궁핍해지고, 강도는 다시 빼앗을 뿐 아니라 더 빼앗을 힘까지 얻는다.

평양에서 집회를 하려면 각종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평양에서 대부흥이 시작되었으니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평양에서 기념식을 해야겠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하나님은 대성회에서 타오르는 제물 냄새보다 북한 주민을 향한 진정한 인애를 원하실 것이다.

한국교회가 평양에서 집회를 하게 되면 첫째, 물질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경험상 북한은 반드시 집회 비용 및 기타 비용을 한국교회에 요구한다. 이것은 주민의 것을 모두 빼앗고도 배고픈 강도의 배를 더욱 부르게 해 준다. 주민에게 직접 지원되지 않는, 소위 ‘한국교회의 사랑’은 무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악이 된다는 사실은 탈북자들의 증언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가 강도에게 치르는 물질적 대가로 인해 주민들은 생명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둘째, 여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픈도어는 5년째 연속으로 북한을 세계 최대의 박해국으로 지목했다. 오픈도어의 관계자는 “북한은 정말 체계적으로 박해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현재 기독교인 수만명이 수감돼 있으며 이들은 정기적으로 고문을 당한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집회에 북한의 가짜 기독교인들이 참석할 경우, 북한은 언론과 매체를 통해 종교 자유가 있는 나라인양 행세할 것인데, 이후 세계교회가 북한 주민들의 신앙의 자유를 촉구할 수 있을까?

셋째, 향후 한국교회의 대북 활동에 분명한 지장을 받는다. 지도자급 목회자들이 북한에서 집회를 하고 올 시, 어찌되었거나 가시적인 무슨 성과를 들고 내려 올 것이다. 아마 자신들이 북한에서 했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북한 기독교의 참상은 제쳐두고 온갖 좋은 이야기와 은혜로운 소식들로 포장된 말을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는 북한의 현실에 대해 더이상 바른 소리를 할 수 없다. 북한까지 가서 은혜로운 집회를 하고 왔다고 간증했던 목회자가 북한의 인권침해와 독재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굳이 평양에서 집회를 하겠다는 목회자들은 왜 남한에서는 대부흥이 재현될 수 없으며 과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부흥은 북한 주민들을 담보로 잡고 북한 정권을 돕는 형식이 되어야만 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