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과 8일 양일간 LA 매리어트 호텔에서는 ‘제2회 미주한인의 날 제정 기념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두 명 선정해 시상했다. 그 중 한명은 워싱턴 주 상원의원 중 한 명인 신호범 의원이었다. 주류 속 한인으로서 한인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신 의원은 주류 사회 속 자랑스러운 한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람 중 하나다. 1993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이어 상원의원, 3선의원이 되면서 부의장직에까지 올랐다. 그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편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2세들을 위해 '한국인2세 정치인후원장학회'를 설립해 적극적으로 돕는 등 한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가 미국 땅으로 건너온 지 40여년만에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것은 고생과 그것을 뒷받침 해 준 신앙이었다.

4살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마저 행방불명돼 졸지에 고아가 됐다. 서울역과 남대문시장에서 노숙을 일삼을 수밖에 없었고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어도 교실 창문 너머로 동냥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 한국 전쟁 중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 생활을 시작했다. 손이 빨라 미군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늘 한이 자라고 있었다. 뒷산에 올라 서러움이 북받쳐 울기도 여러 번, 어느 날은 한 미군 장교에게 들켰다.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미군 장교는 소년 신호범을 미국으로 입양했다.

한국을 떠나던 날 "왜 난 학교에 다닐 수 없는가? 왜 나는 이 땅에서 차별 받아야 했는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알파벳 A, B, C도 모르고 미국에 도착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의와 양아버지의 '언제나 널 믿는다'는 응원 덕에 1년 6개월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브리검영 대학과 펜실베니아대, 워싱턴대에서 국제관계 및 동아시아학 석·박사 학위를 따냈다. 공부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한테 기도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기도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지. 하나님 잘 모르고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도움 많이 받았어."

교회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배운 것은 악을 선으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은 악을 사랑으로 갚는 분이셨다. 그러면서 겪어야 했던 고난도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하나님은 사랑만 주시는 분이 아니야. 벌을 주시지만 다 잘되라고 주시는 것이지, 아프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야. 고생은 괴로운 것으로 끝나지 않아. 사회 지도자가 되려면 찬밥 먹던 경험도 있어야 하고 외로움, 배고픔 다 알아야 해."

신 의원은 삶 속에서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경험을 토대로 인생의 목적과 꿈을 세웠다. 미국에 와서 정치가가 되려고 결심한 것도 심한 인종차별 때문이었다. 1958년 미군에 입대한 그는 백인 군인 친구들과 주말 외식을 나갔다. 텍사스의 한 식당에 들어가려는데 '백인만 출입 가능 White Only' 팻말이 붙어 있었다. 군인이라 상관 없을 꺼라고 친구들은 말했지만 지배인은 그를 던지다시피해서 내쫓았다.

한국에서는 인간차별,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을 겪으며 그는 "왜 나는 늘 차별 당하는가?"하는 물음을 가졌고 정치인이 되어 정책 결정을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한편으로는 한국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아픔이 가슴에 남아 선생님이 되고도 싶었다. 그래서 교수가 되어 40여년을 강단에 섰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꿈을 알고 그를 워싱턴 주지사의 통상무역 통역관에 세워주시고 정계에 진출하는 발을 내딛게 하셨다.

그는 "사람은'빨리빨리'를 외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때에 맞게 사회와 개인을 모두 바꾸신다"며 "반인종차별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면, 내가 그토록 쓴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 이자리에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1992년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했던 것, 98년 상원의원 선거 당시 7만 2천가구의 유권자를 일일이 방문한 기억을 회상하며 "이제까지 겪었던 고생은 고생이 아니고 훈련이자,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했다.

"'넌 할 수 있어(You can do it!)'라는 말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았어. 부족하지만 하나님 모시고 신앙하면서 큰 비전과 목적을 가지고 이뤄지길 염원했지. 내 삶에 하나님이 없었다면 열등감과 내가 받는 차별에 관한 물음을 평생 갖고 살 수밖에 없었을꺼야."

신호범 의원도 그누구보다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나는 누구일까?'를 고민하다가 한국어를 배우며 정체성을 찾았다. 서두수(작고, UW한국학) 교수를 찾아가 한국어를 배웠다. ㄱ, ㄴ부터 시작해 한문, 한국 고전 소설까지 두루 섭렵했다. "이 때 내 뿌리를 찾았다."며 "차별은 내 자신을 내가 몰라서 당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인 2세가 세대차와 정체성 혼란 등으로 인해 자살하기도 하고 방황하는 것을 보며 "비전을 갖고 문제를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을 던졌다. "다른 피부색, 낯선 미국 땅의 한인이라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라"고 말했다. 정체성을 모르면 자신을 피하게 되고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같이 정계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한국인2세 정치인후원장학회'를 통해 2세들의 멘토가 되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 어디든 한인 입양아가 모이는 곳에 찾아가 격려하고 교제를 나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구절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신 의원은 "신앙은 받고 무조건 퍼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아무것도 안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니다."라며 "무슨 일이든 기도하되 할 수 있는 최선과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면 된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 '하나님은 갈 길을 알려주신다. 경험을 통해 손을 잡아주신다. 그 분과 함께라면 못할 것이 없다' 이 세 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봐.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믿음에서 나오는거야. 그러다보면 길과 비전을 찾을 수 있어. 한인들을 머리가 우수하고 부지런해. 뭐든 할 수 있어."

평생 갖고 있던 '나는 왜?'라는 질문이 신앙을 통해 '감사'로 바뀐 그는 지금도 미국 땅에서 '한인 크리스천 대통령'을 양성하기 위해, 한인들과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의원직을 수행하며 올림피아와 린우드를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