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이장렬 교수는 서울대학교(B.M.)를 졸업하고 서든침례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 Div.를, 영국 에딘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신약학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2010년부터 캔자스시티에 소재한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로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Ph.D. 논문을 지도하고 있다. <Christological Rereading of the Shema in Mark's Gospel>, <바디매오 이야기>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맹세와 생존 사이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22:31-34, 54-62

 

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요구했다. (저자 주 1) 32.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너를 위해 기도했다. 네가 돌이키고 나면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여라."33.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저는 주와 함께라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각오가 돼 있습니다."34.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중략] 54. 그들은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뒤따라갔습니다.55. 사람들이 마당 가운데 불을 지피고 함께 앉아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 곁에 앉았습니다.56. 베드로가 불을 쬐고 앉아 있는 것을 본 한 하녀가 그를 빤히 노려보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습니다."57.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여자여! 나는 그를 모르오." (저자 주2) 58. 조금 있으려니까 다른 어떤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그들 중 하나였지?"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난 아니란 말이오!"59. 한 시간쯤 지나 또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보니 (저자 주3) 그와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다"라며 장담했습니다.60. 그러나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당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저자 주4) 바로 그때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닭이 울었습니다.61.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쳐다보셨습니다. (저자 주5) 그러자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신 주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62.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저자 해설 및 묵상>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이라도 기꺼이 맞이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다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주와 함께라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각오가"(33절)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오늘 닭이 울기 전에" 그가 세 번이나 주님과의 관계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4절). '이제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연달아 모른다고 잡아뗌으로써 그간 우리의 관계를 전면 부인하게 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예언 그대로 베드로는 잠시 후 스승과의 관계를 세 번이나 연거푸 부인합니다.

33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이야기만 들으면, 그가 주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투옥되고 순교까지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주여, 저는 주와 함께라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각오가 돼 있습니다"(33절).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청년 시절 많이 방황하던 끝에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월남전 참전을 위해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월남 땅에 도착하여 잠복한 적군의 총구를 보는 순간, 갑자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맘 속으로부터 강하게 치솟았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주를 위해서라면 당당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의 재판 과정 중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살고 싶은 맘이 강하게 치솟았습니다. 여종의 말 한 마디에 예수님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을 장담했던 베드로는 무참하게 무너집니다(56-57절). 그리고 거기서 멈춘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다시 그리고 또다시 처절하게 부인합니다(58절, 59절). 예수님과의 관계가 밝혀지면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체감하는 그 찰나, '예수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어'라는 앞선 고백과 달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예수, 그게 누군데?'라고 말합니다. 마태에 따르면, 베드로가 세 번째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할 때는 아예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마26:74). "내가 예수를 안다면 저주받을 거다!"라고 배수의 진을 쳤습니다. 예수를 전혀 모른다고 잡아떼며 자신의 거짓말을 열정적으로 변호합니다.

닭이 울고 주님과 눈이 마주치기 전(눅22:60-61)까지 그렇게 세 번이나 연거푸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고도 베드로에겐 양심의 가책조차 없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와의 세 번째 부인 사이에는 약 한 시간의 간격이 있었습니다(59절). 그러나 그 사이에도 베드로는 조금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생존, 아니 잔존의 욕구가 베드로 맘 속에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욕구가 너무나 강해서 양심의 소리마저 파묻고 주님이 딱 몇 시간 전에 하신 예언(34절)에 대한 기억마저 억압할 정도로 말입니다. 닭이 울고 주님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그냥 그렇게 불이나 쬐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계속 부인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예언 그대로,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 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을 옆에서 같이 들었던 동료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와 같이한다면 감옥이든 순교든 불사하겠다'(33절)고 당당히 선포하는 베드로가 설마 몇 시간 안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까 싶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생존의 욕구 앞에 주님 앞에서 자기 목숨까지 운운하며 장담했던 베드로의 '충성 서약'(33절)은 백지장보다도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충성 서약도 종종 그와 같습니다. 주를 위해 다 내려놓고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고 말하지만, 막상 주를 위해 조금이라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손익관계를 따지며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쁩니다. 어떻게든 주어진 상황에서 생존 아니 잔존이라도 해야겠다는 욕구가 예수님에 향한 헌신과 충성을 압도합니다. 모든 것을 잃는 상황은 고사하고, 조금만 손해 보는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그것을 막아보고자 안달을 내다 못 해 거의 경기까지 보입니다. 얼핏 보면 겉으로 멋져 보이지만, 우리의 내면은 예수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더 숭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행하시는 여행 중간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 자기 생명일지라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 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근본적 진리를 히브리적 어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분명 바로 옆에서 들었을 베드로는 아직 자신의 목숨을 예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목숨이 위협받고 생존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예수님과의 관계를 전면부인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요? 사실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했던 말(눅22:33)을 보면, 신학적으로 아주 완벽합니다. 죽음도 불사한다는 그의 각오가 당당하고 멋지게 들릴 뿐 아니라, "주와 함께라면"이라는 표현에서 보여지는 바대로, 주님과의 관계에 근거하여 그런 고백을 한 것이기에 정말 준비된 정답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필요에 따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전면 부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완전수인 삼세 번이나 말입니다.

다시 말해, 완전하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자 주6)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려 이제 우리의 말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봅시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떻게 되어도 좋아!'가 우리 내면의 진정한 고백입니까? 아니면 '예수님도 신앙도 내 생존 이후의 문제지!'가 우리 내면의 진짜 노래입니까?

베드로의 당당한 선언이 그저 말뿐인지 아니면 진정한 고백인지를 주님은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당당한 고백 역시 그저 말뿐인지 아니면 진정한 고백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입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와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됐다'는 베드로의 답은 말로만 보자면 완벽했습니다. 우리 내면과 삶의 진정한 고백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은 말은 뻔지르르하게 잘하고 뒤따르는 행동은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거기엔 오해나 왜곡도 물론 적잖이 있지만 실제로 기독교인들이 언행이 일치가 되지 않아서 비판을 받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긴장감 느껴지는 대화(눅 22:31-34)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거듭 모른다고 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54-62절), 하나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우리가 정말 베드로처럼 말뿐인지 아니면 우리의 내면이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떻게 되어도 좋아!'라고 참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욕구가 예수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열망인지 아니면 생존에 대한 열망인지를 성령 안에서 냉철하게 분별하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우리의 찬양이 진정 우리의 내면과 삶의 노래인지도 솔직하게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자 주7)

자신의 이중성과 과거의 실패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그래서 차마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조차 어렵다면,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지만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때는 네 형제를 굳게 하는 일을 해 다오"(22:32; 요21장 참조; 저자 주8)라고 미리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사랑과 포용으로 인해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나 스스로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라는 처참하지만 (눅 22:62 참조) 실은 복된 인식을 갖고, 당신의 모습 그대로 용기를 내어 사랑의 주 예수님께로 겸손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당신의 삶을 다 내맡기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입술의 말과 내면의 고백이 일치되도록 당신을 포기하시지 않고 계속 빚어가실 은혜의 주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특히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께 다 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한 줄 기도>

예수님이 내 생존보다도 더 소중함을 입술뿐이 아니라 제 맘과 삶으로 고백케 하소서. 

 

편집자 주) 본 묵상 내용은 이장렬,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40일간의 묵상』(요단출판사, 2019)에서 발췌하여 개정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요단출판사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사용합니다. 이 책에 대한 추가 정보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mall.godpeople.com/?G=9788935017379   


 

(저자 주1) 이 부분은 욥기 1-2장의 내용, 특별히 사단이 욥을 시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저자 주2) 오늘 본문(눅 22:54-62)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반면, 이어지는 66-7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적 정체성을 인정하신다. 필자는 복음서 기자 누가가 이 두 장면을 간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고 본다.  

(저자 주3) 베드로의 억양에서 그가 갈릴리 출신인 것이 드러났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 있는 이들은 갈릴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자 주4) 열두 제자 중 하나에 의해 성전지도자들에게 팔리고, '수제자'인 베드로에 의해 관계를 전면 부인 당하신 예수님은 분명 측근들에 의한 배신이 무엇인지 이해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그가 돌이키게 될 것과 또 돌이킨 후에 감당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사전에 말씀하셨다. 이것이 베드로가 엄청난 실패를 다시 딛고 일어서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 주5) 돌이켜 자신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베드로를 응시하는 주님의 눈빛은,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것을 즉각적으로 상기시켰을 것이다. 아울러 주님의 눈빛 그 자체가 부인할 수 없는 메시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이때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응시하신 예수님은, 앞서 그가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하도록 격려해 주셨다(32절).  

(저자 주6) 유대인들에게 있어 숫자 '3'은 완전수다. 그런 뜻에서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은 완전히 부인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저자 주7) 새찬송가 94장

(저자 주8) 요한복음 21장이 우리에게 들려주는바, 특별히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단출판사, 2017)을 참고하라.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①>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② >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③>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④>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