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피난민들이 모여살던 부산의 소문난 달동네, 급한 경사지에 판자집과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 기독교와 아무 관련이 없던, 오히려 무속인 생활을 한 할머니,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남묘호랑개교(창가학회라고 불리는 일본에서 창시된 종교) 주문을 외우던 부모님을 둔 아홉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 단칸방에서 삶은 대학생 때까지 계속됐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막노동 일을 하셨고 목수일을 배웠지만 9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목수 일거리가 없는 장마철에는 하루 한끼조차 해결하기 어려웠다. 친구들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러 교회를 가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호통판사'로 알려진 천종호(현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법정에서 비행 청소년들에게 애정을 갖고 지도하거나 호통을 쳐 이와 같은 별명을 얻게 되었다.

2월 11일(일) 오전 10시50분 부에팍교회(김성남 목사)는 천종호 판사를 초청해 간증예배를 드렸다. 그는 롬 12:2 이 그가 그의 신앙의 좌우명이 된 말씀이었다며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증거했다.

천종호 판사
(Photo : Youtube screen shot ) 천종호 판사

그는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으며 그 이후 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며, 교회에서 처음 배운 두 가지, 우상 숭배 하지 말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해 주일 오전에 9시 경에 교회에 출석해 예배를 하루 종일 드리고 돌아와 월요일 한 두시에 일어나 밤을 꼬박새며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암기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선행학습도 하지 못했”으며 그가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친구 어머니가 하시던 만화방 뿐이었다며, “성적이 떨어지면 교회를 못다니게 할까봐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당시 500원 육성회비 조차 내지 못해 학교를 수십번 쫓겨날 뻔했고 중, 고등학교 때는 수업료를 감면 받기 위해 통장님댁을 방문해서 서류를 제출해야 했”을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지나왔다.

천종호 판사
(Photo : Youtube screen shot ) 천종호 판사

그는 2020년 7월에 ‘유퀴즈온더블럭’에서 소개된 편지를 보여주면서,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한 동창이 부산의 유명한 조폭에 가입해 큰 범죄에 연루되어, 스스로 그 죄를 다 뒤집어 쓰고 무기징역으로 현재 29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며, “9년 전 면회하러 간 적이 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저에게 써줬다. 조폭 세계를 동경하는 학생이 있다면 자기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한 일화를 전했다.

그는 “이 친구는 웬지 모를 분노에 쌓여 있었다.하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저는 분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중학교 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단칸방에 아홉 식구가 생활하기에 공부할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새벽 1-2시경 깨어, 한 귀퉁이에서 백열등을 켜고 공부했다. 힘들면 교회를 찾았다.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여행경비가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과 교회가 있어서 좌절하지 않았다”고 그의 마음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렸다.

등록금이 없어 원수 접수를 하지 못한 채 부산 자갈치 시장 근처 서점을 서성이고 있을 때, 그에게 갑자기 나타나 대학원서를 사주고, 버스 비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 버스에 태워 원서를 내러 대학교에 가게 해준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학력교사에서 제가 얻은 성적으로는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대학을 갈 수 없었다. 저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결정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원서접수 마감일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길을 걸어갔다. 부산 자갈치 시장 근처 한 서점에 도착했다. 뜻밖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를 만났다. 그 천사는 박영규라는 친구였는데 저와 같은 반이 된 적도 없었다. 그 친구는 부산대학교 상대에 원서접수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저를 보더니, ‘지금 시간이 몇신데 접수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저를 보고 분위기를 눈치챈 친구는, 원서를 그 자리에서 사서 저에게 주었다. 마감시간 20분 전에 입학원서를 접수했다. 친하지도 않은 친구를 길에서 만나 입학원서를 접수하게 했다. 그 친구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입학원서를 제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친구는 자신이 한 선행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현재 그 친구는 천종호 판사의 사단법인 만사소년(청소년 회복센터)에 이사장으로 함께하고 있다.

친구의 도움으로 부산대에 입학한 천종호 판사는 3년 장학금을 받았고, 1994년 제3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97년 사법연수원 26기를 수료하고 1997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다.

소년재판을 담당하게 된 것은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계획은 변호사로 적당하게 돈을 벌어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은 위기 청소년과 소통하고 있는 삶으로 이끄셨다. 그는, “이렇게 된 것은 단 1%도 제 계획이 아니다. 수익면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성년자라 재산이 없다. 빈곤층 가정이 많기 때문에 거액을 들여 변호사를 수임하는 비율이 1%도 안된다. 소년 재판 경력은 변호사가 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의 삶에 함께 했음을 증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