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텐슈타인에 의해 주창되고 호켄다이크 등에 의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발전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신학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지난 반세기의 선교신학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개념이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하여 복음주의 진영은 초창기에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보쉬가 지적한대로 이 개념이 본래 주창되었던 때의 본래적인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선교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강조한 점은 합당하지만, 문제는 그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선교의 방향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 점 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잔을 포함한 복음주의 진영도 이제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케이프타운서약 1부 신앙고백 마지막 10장의 제목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이며, 이 장에서 케이프타운서약은 "세계 선교가 ... 하나님의 선교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죄와 악으로 깨어진 창조세계를 ... 새로운 창조세계로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선교를 성취하실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기독교 선교 운동은 자칫 인권운동, 사회운동, 복지운동, 환경운동 등으로 축소 왜곡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고, 그 뜻은 성경에 근거해서 얻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 장은 성경 특히 그 중에서도 해방과 인간화 사역의 가장 대표적인 역사로 손꼽히는 출애굽 사건의 과정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들을 심도 있게 분석하면서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고 여기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논의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를 재고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로잔운동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하나님의 선교 이해를 찾아보고자 한다. 

I.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심 이해 경향 

1.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세상의 구원'이 아닌 '세상의 샬롬'이라고 보는 경향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선교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출현하면서 이러한 관점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다기보다는 세상 자체를 샬롬이 넘치는 곳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보는 경향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에큐메니칼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인 호켄다이크(J.C.Hoeckendijk)에게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이루시는 것은 샬롬이라고 보았는데, 그 샬롬은 개인 영혼 구원 이상의 것으로 평화, 정직, 공동체, 조화, 정의 등의 포괄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또 이 샬롬은 사회적 사건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관점의 근거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샬롬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평강의 왕"(사 9:6),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미 5:5). "그가 ... 화평을 전할 것이요"(슥 9;10), "...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등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샬롬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이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의 관점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대표적으로 JPIC(Justic 정의, Peace 평화, Integrity of Creation 창조질서 보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이 땅위에서 그의 선교를 수행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사역은 바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사역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관심이 세상의 구원보다는 세상의 샬롬에 있다고 보는 경향 속에서 평화 문제와 창조질서 보존의 문제와 더불어 정의 문제가 에큐메니칼 선교의 핵심 목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 샬롬을 이루는 방법은 전도보다는 구조악 해결로 보는 경향 

전통적인 선교에서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을 개인의 구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전도를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생각한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세상의 샬롬 즉 정의, 평화, 창조질서보전 등이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라고 보는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는 전도보다는 오히려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구조악 해결의 활동이 더 주된 방법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샬롬의 관점에서 보는 구원이해는 죄의 개인적 차원보다는 사회적 차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보인다. 즉 죄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것이며, 이러한 죄의 해결은 구조적인 악에 속박 당하여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데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은 개인전도로 이루어지기보다는 구조악을 향한 투쟁으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는 구조악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웁살라는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압제 받는 자들이 권리를 옹호하고 국내 및 국가 간에 경제정의가 확립되도록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밴쿠버도 "교회의 영적인 투쟁은 가난한 자들, 압제받는 자들, 소외된 자들, 추방된 자들의 투쟁과 관계되어 있다. 성령은 투쟁하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JPIC 대회는 "우리는 인권을 침해하고 개인과 집단의 충분한 잠재력의 실현의 기회를 거부하는 모든 구조와 체제들에 저항할 것이다. 특히 고문, 실종, 탈법적 법집행, 그리고 사형 등에 저항할 것이다." 라고 결의하였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문서에서도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 만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인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정의, 인간 존엄, 생명의 대의를 지키는 운동에 ...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한다." 라고 말한다. 

아울러 샬롬을 강조하는 견지에서 보면 전도는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전하기에 샬롬에 다소 방해가 되는 요소로 비칠 수 있다. 비체돔(Georg F. Vicedom)은 말하기를 "그러나 복음이 선포될 때 인간들 사이에는 장벽이 형성된다. 왜냐하면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특별한 생활방식 -공동체로 모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서 복음전도로 인한 갈등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 관점은 전도를 다소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에큐메니칼 진영은 전도라는 용어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고 칼 브라텐(Carl E. Braaten)이 말한 대로 ".... 공식적인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고전적 의미 안에서의 전도에 대하여 립서비스를 한다. 즉 [에큐메니칼 진영은]전도를 거부할 정도로 비외교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샬롬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전도에 포함시키는데, 예를 들면 '함께 생명을 향하여' 문서는 "전도는 자기 비움의 겸손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또한 다른 문화들과 신앙들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또한 전도는 이러한 지형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가치들에 모순되는 억압과 비인간화와의 구조들과 문화들에 맞서야 한다." 라고 말한다. 즉 전도보다 구조악 해결에 더 깊은 관심을 갖기 때문에 전도마저도 비인간화된 구조에 맞서는 활동으로 확장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주된 관심의 대상을 교회가 아닌 주변부 사람들로 보는 경향 

전통적인 신학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다. 또한 교회는 지상에서 유일하게 구원의 복음을 맡은 기관으로서 복음을 전할 유일한 기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개인들의 영혼 구원이기보다는 세상의 샬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교회가 아닌 세상이며 세상의 샬롬을 위한 기구는 교회 외에도 다양한 기구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만이 특별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의 견지에서 볼 때 교회는 세상의 한 조각, 즉 그리스도의 현존과 하나님의 궁극적 구속 사업을 지향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세상에 부가된 하나의 첨가물(postscript) 이다"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이 말에 의하면 교회란 세상에 부가된 부수적인 존재일 뿐이며, 다양한 기구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즉 전통적인 시각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교회는 이제 부수적인 위치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런 면을 에큐메니칼 진영은 "... 교회는 하나님의 최종적 목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께서 전체 피조물과 교제하시는 데 필요한 도구요 성례전이다" 라고 진술하였고, 이러한 모습을 이형기는 '탈(脫) 교회 중심적 교회관' 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가난한 자, 약자, 억압받는 자 등을 다 포함하는 용어라 할 수 있는 주변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부 인생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라 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가난한 자들의 옹호자(아모스 5),' '상처받기 쉬운 자들(신명기 24)과 지극히 작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하나님(마태 25: 31-46)'이시기에 이들의 해방이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은 해방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이들은 해방의 사역을 이루어가야 할 주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기존 권력층은 해방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 오히려 해방은 주변부 인생들로부터 시작될 일이며, 이런 점에서 산 안토니오는 "무엇보다도 그는[예수는]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어린이들, 병자들, 공개된 죄인들 및 힘없는 사람들에게 우선순위를 부여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방법에 따른 선교란 ..... 가난한 사람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엮어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문서도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주변으로부터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 주변에 있게 함으로써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맞서는 것이다."라고 한다. (계속) 

안승오(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선교신학) 

※ 자세한 각주 등은 안승오. 『로잔 운동의 좌표와 전망』. 서울: CLC, 2023. 참조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