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을 즈음에, 한국 교회는 많은 교단이 개혁의 요구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교회만 아니라 신학교에도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컸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정치 상황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군부 쿠테타로 말미암아 촉발된 부마항쟁에 이은 광주 민주항쟁으로 많은 시민이 군인의 총에 쓰러졌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이 되었지요. 이후 군부 정부를 향한 불만 표출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한국 교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태였습니다. 교회의 일부는 군부를 지지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면, 다른 쪽은 정부에 대한 저항을 접지 않았습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외칠 때, 교회의 어른 세대는 자녀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반정부 활동을 반대하였고, 정부의 사찰이 부담스러웠던 목회자들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한국 사회는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습니다. 교회도 그 비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회와 교회는 정치이념으로 갈라져서 서로를 배격하고 있는 처지에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에 선교사가 된 나는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난 교인들은 대부분 해외 선교부를 담당하는 장로나 집사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열정과 충성도는 정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과 좀더 깊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분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지요. 교회에서 이렇게 충성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과 가정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게 자리잡고 있더군요. 모든 이들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교회에 충성을 다하느라, 정작 가정 안에 있는 문제를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을 하는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로 하나님께 헌신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선교사의 자녀에게 복 주실 것이라는 공식이 그대로 본인들의 헌신에도 적용이 된다고 보는 것 같았네요. 그런데 문제는 복 주시는 내용이 좋은 학교, 번듯한 직장, 성공적인 사업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심지어 어느 목회자는 “해외 선교를 안 하면 교회 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설교하는 것을 내가 직접 들었으니까요. 당시 한국 교회는 ‘말씀 중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얼마나 옳게 이해하고 있는 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배운 말씀을 실천하는 순종의 삶은 어디에 있는 지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이민교회를 만나면서 교회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실감했습니다. 내가 처음 달라스에 와서 성경번역 훈련을 받을 때 한인 교회의 수가 약 20여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2년 반 후 달라스를 떠날 때 두 배로 그 수가 늘어났더군요. 복음 전도로 교회가 늘어났다면 좋겠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난 내분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주일 예배 때 서로 대립하는 양측을 분리하느라 경찰이 출동하는 교회도 있었지요. 내가 있었던 교회도 목회자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황당하게 여겼던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신뢰를 줄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게다가 후속으로 오려고 하는 목사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들의 어이없는 요구 조건에 고개를 흔들더군요. 이렇게 교인은 교인대로,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불신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이민교회도 한국에 있는 교회와 다를 바 없이 ‘말씀과 삶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라는 걸 보게 되었지요. 결국 미주 이민 교회의 현실의 원인은 한국 교회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이런 문제 의식을 갖게 되면서, 선교 훈련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제는 선교를 외쳐야 하는데, 내 마음이 편하지 않더군요. 선교를 외치는 것이 앞으로 선교비를 더 마련해야 하는 나의 처지로는 당연한 건데, 그게 불편하게 느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지요.

“너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아느냐?”
“아무래도 ‘말씀과 삶’인 것 같은데요.”
“그러면 네가 그대로 하면 되지 않니?”
“그러면, 내게 필요한 선교비는요?”
“네가 내가 원하는 걸 하는데, 네가 필요한 것을 내가 채우지 않겠니?”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