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성탄주간 묵상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성탄주간 묵상

이장렬 교수는 서울대학교(B.M.)를 졸업하고 서든침례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 Div.를, 영국 에딘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신약학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2010년부터 캔자스시티에 소재한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로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Ph.D. 논문을 지도하고 있다. <Christological Rereading of the Shema in Mark's Gospel>, <바디매오 이야기>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성탄주간 묵상 (1) [2023년 12월 18일 월요일] 우리의 굴곡진 삶과 예수님의 계보

 성탄주간 묵상 (2) [2023년 12월 19일 화요일] '바벨론'에 갔다고 다 끝장 난 것은 아니다!

성탄주간 묵상 (3) [2023년 12월 21일 목요일] 따뜻한 의로움

 성탄주간 묵상 (4) [2023년 12월 21일 토요일] 제4의 반응

 

[2023년 12월 21일 목요일] 따뜻한 의로움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1:18-19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말씀해설 및 묵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로움'이란 보통 악에 맞서 싸우고 옳은 일에 용기를 내며 손해 보고 댓가를 치루더라도 불의한 일은 과감히 비판하고 고발하는 태도다. 그런 이미지가 의로움을 잘 대변해 준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매우 풍요롭고 입체적인 실체이며 때로 예기치 않은 표현 방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오늘 본문이 이를 잘 드러낸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마 1:19). 개인적인 한계상황 가운데서도 생명을 중시하고 사랑하라는 율법의 본 정신을 이행했다는 의미에서 요셉은 의로운 자다. 그는 마리아에게 공개적 망신과 치명적 수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파혼하고자 했다. 요셉과는 상관없는 임신으로 인해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신 22:23-27), 요셉은 두 명의 증인 앞에서 마리아에게 '이혼증서'를 주는 것으로 조용히 파혼 절차를 마무리하고자 했던 듯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요셉의 의로움은 따뜻한 의로움이다. 그의 따뜻한 의로움은 자신에게 깊은 상처와 모욕을 가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을 향한 배려의 모습을 취한다. 당시 유대교에서 남자는 18세 그리고 여자는 10대 중반 이전 나이에 결혼식을 올리곤 했다. 그에 앞서 정혼(법적 구속력을 지닌 약혼) 하였으나, 결혼예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동거, 동침하지 않도록 요구됐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의 정혼 관계를 위반하고 간음을 한 결과 임신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와중에도 마리아를 향한 긍휼의 맘을 잊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해 성령을 통하여 전례 없는,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셨음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마1:20-25; 눅1:26-38). 그럼에도 저자 마태는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던 요셉의 행동을 무지함이 아니라 의로움과 연관 짓고 있다!

의로움은 종종 불의에 대한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물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의로움이 때로는 은밀히(이하 필자 주) 타자를 배려하는 모습, 도무지 어려울 것 같은 상황 가운데도 여전히 남을 배려하는 자기부인적인 긍휼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예수님의 팔복 설교는 의로움과 긍휼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선명히 가르쳐준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 5:6-7).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과 "긍휼히 여기는" 것을 병치하여 서로 통합시키신다. 이 둘은 그렇게 서로 연결되고 또 중첩된다.

이번 성탄의 계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제자들이 많아지길 소원한다. 우리 가운데 그같은 목마름이 더욱 절실하고 강렬해지기를 소원한다(마 5:6). 손해와 비난을 무릅쓰고 불의에 맞서는 용기가 다시금 제자들 가운데 회복되기를 간구한다. 동시에 우리 가운데 자기부인적인 긍휼과 배려를 실천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또한 기도한다(5:7). 긍휼을 베풀기가 어렵고 더 이상은 타인을 배려해 주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아지는 이번 성탄의 계절이 되기 바란다. 그러니까 요셉이 그랬듯 말이다. 무엇보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릴 대신 해 십자가를 지신 주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듯 말이다.

 <한 줄 기도> 제 맘과 삶 가운데 의에 대한 목마름과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서로 하나되게 하소서.

편집자주, 본 성탄묵상 가이드는 이장렬 저, <마태복음 1-2장을 중심으로 한 25일간의 성탄 묵상>(2019, 요단출판사)에 근거한 내용이며 요단출판사 및 저자의 동의 하에 게재합니다. 이 책에 관한 추가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5일간의 성탄 묵상| https://mall.godpeople.com/?G=9788935017898

필자 주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이 성령을 통한 잉태임을 깨닫기에 앞서 요셉은 율법에 따라 마리아와의 정혼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요셉은 일을 '은밀하게'(개역개정: "가만히") 파혼하고자 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1:19). 여기서 "가만히"(= 은밀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λάθρᾳ(음역: 라쓰라)로 마태복음에 2회 등장한다. 그 첫번째 용례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9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이 단어는 마리아를 향한 요셉의 긍휼과 배려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공개적 수치를 주지 않고자 배려했고 자기부인적인 긍휼을 베풀었다. 두번째 용례는 헤롯왕과 관련해서 발견되는데, 이 경우는 '은밀함'이 그의 악한 계략과 연관되어 사용된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은밀하게]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7-8).

헤롯이 정말 자신의 말대로 왕으로 난 아기를 경배하기 원했다면(8절) 굳이 동방박사들을 은밀히(7절) 불러 물어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말과는 정반대로 헤롯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으로 난 이를 조기에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왕위를 지키고자 비밀스레이 행동했다. 비록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통해 묘사되기는 하지만, 헤롯의 은밀함과 요셉의 은밀함은 그 동기와 목적에서 서로 극명히 대조된다. 우리의 은밀함은 이 둘 중 어느 쪽을 닮았는가? 우리의 은밀함은 요셉의 경우처럼 배려와 긍휼의 표현인가 아니면 헤롯의 경우처럼 거짓과 집착적 자기방어의 상징인가? 이름은 갖지만 내용은 극명히 대조되는 이 두 가지 은밀함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