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최윤정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최윤정 교수

한국 사회에 다문화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후 세계화라는 화두가 부상하게 되면서부터다. 1990년대 이후 정치, 경제,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경제적인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타국으로 건너갈 뿐만 아니라 아예 이민을 통해 이주민으로 정착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국에서는 ‘다문화’라는 단어가 이주민을 가리키는 사회적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원래 다문화는 multi (다양한, 다수의) + culture (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그야말로 하나의 문화가 아닌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다문화 사회(multicultural society)라고 하면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그러나 단일문화에 순혈주의 전통까지 지닌 한국에서 다문화는 그저 ‘우리’와 다른 인종과 문화를 나타내는 타자화에 대한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고 여기엔 사회적 차별의 뉘앙스까지 내포되게 되었다.

한편, 문화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정의가 다양하다. 주로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의거한 사고방식과 그에 따른 산물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것으로 볼 때 문화는 인간의 삶에 등장하는 관습, 예술, 기술, 제도, 규범, 가치 등 모든 유형과 무형의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흔히 빙산에 비교되기도 하는데 수면 위에 떠있는 얼음은 빙산의 일각일 뿐 실은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몇 십 배 더 웅장하고 거대하다. 마찬가지로 문화에 있어서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고 중요하게 작용한다. 가치관, 세계관 등 개인 및 한 사회에 내재된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지배하고 움직인다.

그래서 다문화라고 하면 사람들의 피부 색깔, 생김새, 인사 방법, 또는 언어 뿐만 아니라 종교나 신념에 따른 가치관과 세계관 등이 보다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다문화에 있어 그 다양성의 구분은 인종이나 종족 집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를 답습해온 한국인에게는 다양성에 대한 준거가 인종과 민족 뿐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겠으나 서구의 다문화 사회는 인종과 민족과 언어의 카테고리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준거군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 하나가 현대사회에 등장하게 된 인간의 권리이다. 인권에 따른 다양성은 현대 사회를 훨씬 복잡하게 하며 다문화 사회를 심화시켜나갔다.

예를 들어, 오늘날 노동자들은 경제적 지배 계급에 대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하나의 다문화 스펙트럼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 있어 사회적 계급이 다문화를 구성하는 준거틀로 작용하는 것이다. 다른 예는 여성이다.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여성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타자화 되고 대상화 되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여성들이 현대사회에 들어서 인권에 대해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이는 다문화의 개념으로 등장한다.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다. 불교적인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오류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장애인들을 타자화하고 터부시해온데서 사회 불평등이 고착화되었다. 이제 그들도 권리를 찾아 행복권을 주장한다. 여전히 남아있을 기득권자 중심의 메커니즘을 거부하는 그들 역시 다문화로 분류될 수 있다.

  이렇듯 다문화는 인종과 민족에 대한 다양성 뿐만 아니라 인권에 따른 다양한 인간군을 내포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복잡한 현대 다문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에 대한 존중이고 관용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폭력이 되어 벌어지는 참상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또 하나의 실험대이다. 인간 이성이 얼마나 대화와 평등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자연을 보라.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은 다양한 생물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공존의 메커니즘을 늘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유기체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수억 수조의 세포와 조직들이 조화 속에서 신비함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보편주의와 획일주의가 만연한 한국사회의 다문화 심화 속도가 80마일이라면 그것을 포용하는 인식 변화의 속도와 감각은 훨씬 느리고 둔하다. 그 속도 차이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의 폐해는 고스란히 다음 세대의 몫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강포(强暴)를 넘어 지혜와 믿음의 시대를 갈구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