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세 가정을 데리고 개척한 교회에서. 갈등으로 인한 분열을 겪지 않으며 35년간 목회를 해온 한 목사의 음성에는 후배 목회자들, 이제 막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작하는 교회들의 목회자들을 향한 자상함이 서려 있었다. 그 자상함으로 인해 묻힐 수도 있겠지만, 후배 목회자들을 향한 충고를 전할 때는, 두루뭉술한 빈말이나 희망고문하는 근거없는 소망은 일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후배를 챙기는 선배 목회자의 자상한 어조로, 설득을 위한 근거들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인터뷰어가 이번 인터뷰의 방향과 취지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는 먼저 잘못된 명칭을 지적했다.

"작은 교회 보다는 시작하는 교회라고 부르고 싶다. 내 마음은 그렇다. 모든것은 싹이 나는 것처럼 커질 텐데 그 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클지 어떻게 아나, 작은 교회라고 붙여 놓으면 누구보다도 목사님 자신이 스스로 가치를 그렇게 규정해 버린다. 우리가 사용하는 명칭이 소망을 주는 명칭인가 틀에 박히게 하는 명칭인가, 이런 것을 고민해 보면 좋을 거 같다."

2018년 5월 김영길 목사는 8년간 교회 청년담당 부목사로 사역한 구봉주 목사에게 목회의 바톤을 넘겨주었다. 이후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기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은퇴 후 원로 목사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였다.

-은퇴한 이후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

은퇴하기 전에 미리 준비한 사역이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남은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주신 은사라고 그럴까, 나의 장점이 무엇일까를 찾아 내는 것이고 그것은 지난 과거를 돌아봐야 찾아 낼 수 있는 것이고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과거에 신앙계라는 월간지를 7년 동안 편집하고, 연구소를 세워서 만 3년 동안 평신도 훈련을 했다. 제게 주신 은사 중에 하나가 글을 쉽게 쓰고 글 쓰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은퇴하고 나서 뭘할까 생각하는데 설교할 때 마다 짧은 텍스트를 가지고 현재 삶과 컨텍스트에 연결지어 설교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제한된다. 성경을 최소한 한 권씩, 혹은 유사한 내용의 성경을 한 두 권 씩 묶어서 전체 숲을 보듯이 성경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가슴으로 성경 읽기
(Photo : 쿰란출판사) 김영길 목사는 은퇴 후에 성경을 보다 큰 호흡으로 읽으면서, 성경 이야기를 하나 하나 풀어나간 《가슴으로 성경 읽기》를 집필하고 있다. 첫 번째 책이 창세기를 읽어낸 《은혜와 회복》이고, 두 번째는 마태복음을 읽고 쓴 《제자 되기》, 세 번째는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한 권으로 한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행》, 네번째는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쓴 《하나님의 아들》, 다섯번 째 《십자가로 푸는 율법》, 여섯번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이방인이 만난 예수》, 일곱번째 《열왕기와 역대상을 묶은, 왕들의 이야기》, 여덟번째 《로마서, 로마에 사는 그대에게》이며, 이외에도, 칼럼집 《믿음과 0.2퍼센트의 가능성》을 은퇴 직전에 출간했다.

지식은 질문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많은 질문들을 하면서 성경을 읽었다. 그게 내 설교를 준비하는 자세이기도 했다. 그래서 책 제목을 '가슴으로 읽는 성경'이라고 했다. 목사라는 직업으로, 학문적으로 읽는 성경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어보려 했다. 왜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셨지라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왜 죽어가는 딸을 고쳐 달라는 회당장 이야기 중간에 , 열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 이야기가 중간에 들어가 있는지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성경은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압축해서 만든 책이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해서 빈 공간을 채우도록 허용하고 있다. 잘못된 해석만 아니라면, 다른 성경의 내용에 비춰서 가능한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상상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가슴으로 읽다보면 날실과 씨줄이 얽히듯 그 안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두 번째는 내 자신이 3가정으로 시작한 교회를 했기 때문에 모든 경험을 다 해보았다.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 어떤 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목사님들에게 그 턱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지 제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면서 선교사역도 하고 있다. 그저께도 멕시코 추기성 선교사를 만났다. 20년 과달라하라 (Guadalajara)에 있으면서 멕시코의 두번째로 큰 도시에 있으면서 거기서 4시간 차로 들어간 곳의 멕시코 원주민을 섬기는 사역을 하신다. 20여년 동안 등짐을 매고 산길을 다니며 수고하고 치과 사역을 하고 계신다. 그 선교사님이 과달라하라의 교회를 현지 멕시칸 목사에게 맡기고 자기는 4시간 떨어진 곳에 들어가서 센터와 클리닉을 세워서, 목회자 훈련을 하고, 청소년 사역을 하고 싶다고 하신다. 그곳 청소년들 13~14살에 엄마가 되기도 하고, 4명까지 아내를 두기도 한다. 챗GPT를 이야기 하는 시대에, 도시에 나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10나라를 5년 반 동안 다녔다. 은퇴할 무렵에 10여년 동안 모은 칼럼으로 책을 냈고 가슴으로 읽는 성경을 썼다. 현재는 8번째 <로마서> 까지 썼다. 가슴으로 읽는 성경 첫번째 책 <창세기>가 영어 번역이 거의 다 끝났고 스페인어어와 캄보디아어로 번역하고 있다.

세 가정으로 개척해서 35년 간 목회한 김영길 목사는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시작하는 교회들에게 자신이 목회를 통해 얻은 깨달음과 지혜, 경험들을 나누고 싶어한다.

"시작하는 교회는 부흥사를 초청할 여력이 없다. 또 자격지심이 들고, 작은 교회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아서 적극적으로 집회를 요청하시지 않는다. 내 책 앞 페이지마다 이메일 주소를 넣고, 작은 교회는 방문해서 자비량으로 집회를 해드린다는 멘트를 적어 놓았다. 거기 가서 부흥회를 하면 꽉 찬 느낌이다. 작다는 느낌이 전혀 없고 오히려 은혜가 충만하다.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작하시는 목사님들이 좀 담대했으면 좋겠다."

김영길 목사
(Photo : 기독일보) 김영길 목사(감사한인교회 원로 목사)

그러면서, 김영길 목사는 시작하는 교회의 목사님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

"아울러서, 시작하는 교회의 목사님들이 해결해야 될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즉 자기 존중을 확립하는 것이다. 시작하는 교회 목사님들은 마음이 복잡하다. 경쟁 의식, 열등심. 열등심과 우월감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 교회이지 다른 교회들 앞에서 내 교회가 아니니까. 50명 모이는 교회 목사님이 30명 모이는 교회 목사님을 만나면, 우월감을 느끼고, 또 큰 교회 목사님을 만나면 열등감이 든다. 너나 할 거 없이 열등의식과 우월감의 노예가 되었다. 시작하는 교회 목사님은 강하고 폭넓고 선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작하는 교회 목사님이 항상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교인들에게 얽매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권위의 인물이 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물권을 지니고 있고, 영향력 있는 분들의 눈치를 살핀다. 사실 부모도 자식이 권위의 인물이 될 때가 있다. 자식에게 얽매여서, 자식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 교인들이 권위의 인물이 되면 안된다. 그러면 목회자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목회자가 오히려 교인에게 끌려가는 형태가 되고 만다. 특히, 시작하는 교회에는 고집있는 사람들이 모이고 개성들이 강하다. 그들의 의견을 그냥 따라가다보면 결국, '내가 뭔가' 하는 회의감이 들고 그게 쌓여서 폭발하면 교인들과 대결구도를 세우게 되고 그러다 교회가 갈라진다."

교회성장연구소의 한 목사는 풀러 신학교의 맥가브란 박사와 그의 제자 피터 와그너에 의해 시작된 교회성장학이 한국에 전파되면서, 성장주의의 불꽃을 지폈으며, 2천년에 들어서면서 교회 성장이 둔화 혹은 감소하면서, 그 성장의 반사작용으로 '교회 건강'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다고 썼다. 그러나 김영길 목사가 볼 때, '큰 교회=건강하지 않다'라는 공식은 잘못됐다.

-무조건 큰 교회가 무조건 좋은 것일까? 작더라도 은혜가 충만하고 그 한 사람이 천국 백성으로 세워진다면 건강한 교회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양적 성장이 최고의 모델일까? 교회가 커지면 목양에서 부족한 부분이 생기지 않을까?

"건강하면 씨를 심으면 건강하게 자란다. 그러면 건강하다는 것과 성장이라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다', 여기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건강한 교회는 성장한다. 다만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성장이 목표가 되었을 때, 그것은 굉장히 인위적인 것이 된다. 성장주의가 되면 아무리 올라가도 그 마음 속에 만족이 없다."

"어느 정도까지 커야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콩을 심었는데 어느 정도 자라야 열매를 따먹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능력(capacity)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더 어려운 훈련을 통해서 더 어려운 일에 쓰신다. 아무나 2백만명을 데리고 갈 수 있는가? 모세는 2백만 명을 품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보다 작은 능력을 지닌 다윗은 쫓겨다닐 때 겨우 5~6천명을 데리고 다녔다. 하나님게서 맡겨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다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성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교회는 한번도 이벤트는 안했다. '이벤트를 해서 사람들이 여기로 오게 해야지'라는 의도로 이벤트를 한 적이 없다. 성장을 위주로 교회가 이벤트를 했다면 순수성이 사라진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건강한 교회로 가는데 살이 붙어서 성장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살이 붙으니까 선교도 활가차게 할 수 있고, 교회도 개척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틀로만 생각해서 큰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작은 교회는 건강한가? 아닌 경우도 있다. 크다고 다 잘못 된 것도 아니다. 그것 보다는, 공식을 '건강한 교회는 성장한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다'로 바꾸면 좋겠다."

김영길 목사는 펜데믹이 지나며 주일학교가 없어졌다는 교회들이 많다며, 그럼 교회가 성장위주로 가지 않게 되어서 건강해졌다고 할 수 있냐고 되물으며, 목사님들이 전부 실의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가 부흥의 동력을 상실했다며, 이것은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분명한 자각의 부재와 연결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려면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건강해지면 다시 성장하게 된다. 한국교회를 다니면서, 한국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부흥의 동력이다. 한국교회 안에 한동안 유행했던 게 교회 내에 카페를 만드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 와서 소통의 장소로 만들면 동네 사람들과 소통되어서 교회를 다 나올 줄 알았다. 요즘은 별로 효과가 없어서 줄어드는 추세이다. 사회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존재이다. 3만 달러, 5만 달러 연소득의 국민과 3천 달러, 2백 달러, 5백 달러 연소득의 국민하고 하나님 앞에서 다른 국민들 아니다. 똑같은 사람이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얘기인가? 그들이 해결해야 할 죄의 문제가 있다. 존재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은 열망이 마음 속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 내 인생이 언제 가치가 있는가. 아주 근원적 질문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도 똑같고 구원의 메시지도 똑같다. '너희 속에 천국 없지?' '맞아요, 사는 데 재미가 없어요.' '천국 갖고 싶으냐? 그러면 회개하라', 예수님은 그렇 접근하셨다."

"목회자들이 동력을 상실했다. 목회자로 내가 할 일이 뭐지에 대한 대답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회 정의 ,사회 봉사, 부수적인 것들에 다 마음을 빼앗겨서 가장 정직한 메시지를 전할 곳이 교회인데 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잃어버렸다. 설교를 에세이 같이 만들어 놔서 설득력을 잃었다."

옆 마을 교회에까지 솥단지를 싸들고 가서 교회 앞 마당에서 밥하고, 일주일 내내 말씀을 듣고 기도한 한국교회 부흥기를 언급하며, 김 목사는, 하루 4번씩, 일주일에 18번에 걸쳐 말씀하고 찬송하니 은혜를 안 받을 사람이 없었다고, 그게 한국교회 부흥의 밑거름이었다고 말했다.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 하루에 4번씩 총 18번을 설교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목사님들이 대단한 분들이 아니었다. 18번을 기도하고 말씀하고 찬송하니 은혜 안 받을 사람이 없다. 그게 한국교회 부흥의 밑거름이었다. 지금 그렇게 하는 교회가 하나도 없다. 교인들은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동시에 편한 것을 원한다. 사람들은 다 그렇다. 리더가 끌고가야 하는데 리더가 사람에 맞추다 보니 그것은 점점 사라져 간다."

시작하는 교회들을 방문해 그들을 위해 집회를 인도하고, 그들의 사정을 들은, 그는 무엇보다도 이 말을 그들에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시작하는 교회 목사님들에게 해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그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목사에게 달려 있다. 우선 목사님이, 권위의 인물을 하나님에게 둬야 한다. 나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 나를 부르시고 일하게 하신 성령에 두어야 한다. 성도들은 목사님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본다."

"기본적으로 100명을 넘지 못하는 큰 이유는 교인들이 근본적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의 교회를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숫자가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에는, '우리 교회가 옛날 같지 않아', 그러다가 엉뚱한 이유를 찾아서 교회를 떠난다. 이 분들이 교회를 떠날 때, 속마음을 얘기하는 대신 목사님 흠을 잡거나, 설교를 비판한다. 제일 공격의 대상은 사모이다. 핵심은 이 가족적인 분위기에 머물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목사님이 하나님을 바라 보고 있으면 교인들은 목사님이 보는 시선을 본다. 구체적으로는, 목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살아 있는 메시지를 기도하는 가운데 받아서 성도들에게 줘야 한다. 아무리 목사님이 성격이 좋고, 뭐가 좋고.. 다 쓸 데 없는 얘기이다. 그렇게 두 번 세 번만 교회가 깨지고 나면 , '나는 하나님께서 작은 교회 맡기신 것 같다'. '성장 안하는 것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인 거 같다'라고 착각한다. 사실은 그 교회가 건강한가? 일단은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한다. 제가 볼 때 이 문턱을 넘는 핵심은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못 벗어난다."

천 개의 설교, 어떤 관점에서 읽었는가를 찾으라

김영길 목사는 메시지를 찾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 전수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자기 설교에 자만심을 갖고 있다.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다른 사람 설교를 들으려 하는 사람이다. 좋은 예화를 찾으라는 게 아니라, 이 분은 이 본문을 어떤 관점에서 읽었나를 찾는 것이다. 믿음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야이로 회당장의 이야기를 보자. 하나님이 믿음이 씨를 유대인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에 뿌려 주셨다. 그 믿음의 씨가 뿌려졌으면 싹이나고 커야 한다.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통해서 씨가 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경험을 들으면 내 믿음에 영향을 끼친다. 성도와 성도가 교통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저 사람의 신앙의 어려움과 극복의 이야기을 들으면, 그의 믿음이 내 안에 흡수가 된다. 야이로 회당장은 예수님과 같이 가다가 열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을 만났다.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묻자, 여인이 자기 사정을 이야기한다. 12년 동안 얼마나 할 얘기가 많았을까. 그 레슨이 삽입되어 있는데, 열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이 치유 받는 이 사건을 목격하면서 야이로 회당장의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 믿음의 씨가 자란 것이다. 그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예수님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신다. 믿음의 세 번째 단계이다. 예수님이 손 잡고 가는 단계이다. 내 힘으로는 믿을 수 없는 단계이다. 이 믿음의 세 번째 단계는 열매 맺는 단계이다. 우리 신앙 생활에도 믿음의 성장 단계가 있다. 야이로 회당장에 생겨난 믿음은 어디서 난 믿음일까? 이런 게 천 개만 모아지면 그 목사님이 성장한다. 노트에 천 개만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린다."

"같은 말씀인데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요나서를 볼 때, 하나님께서 요나를 구원하신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요나를 포기하실 수 있었다. 선지자가 요나 하나인가?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를 포기 안하신다. 고기 뱃속에 넣어서라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구글 맵으로 니느웨, 지금의 모술(Mosul)을 찾아 보았다. Is가 기승 부리던 곳, 사담 후세인이 숨어 있다가 잡혔던 곳이다. 거기 요나의 회당과 요나의 무덤이 나온다. 요나 때로부터 2천년이 지난 후 그곳에 나비 유누스(Nabi Yunus, 요나의 무덤)가 지어졌다. 지도에 들어가보니, 거기 살던 사람들 인터뷰가 나오는데, 세 종교 사람들이 이 곳을 참배했다고 한다. 니느웨 대신들이, 불평하고 있는 요나를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절하고, 하나님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모습에 요나의 마음이 녹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가 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기서 죽었다면, 평생을 거기서 그들을 가르쳤고 그래서 그들이 그를 기념해서 모스크를 지었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어떤 관점으로 보았는지.. 그것만 천 가지를 만들어 보라.

김영길 목사는 이미 몇 몇 후배 목사들에게 이것을 가르쳤지만, 변화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자기 틀이 깨져야 한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해체시켜야 하는데 이 작업이 어렵다. 목회보다 어려운 게 없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과의 관계이다. 장인어른 충남에서 큰 석제 공장을 하셨다. 그분이 돌은 하나도 어려운 거 없다. 그것은 깨는 대로 가만히 있고 새기는 대로 가만 있는데 그것을 새기고 깨는 사람들이 제일 어렵다. 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 다루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야곱 읽기를 통해, 어떻게 우리 안의 골격과 틀이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것을 방해할 수 있고, 빗나간 방식으로 성경을 오독하게 하는지 언급했다.

"많은 목사님들을 야곱을 사기꾼이라고 한다. 성경에 야곱이 사기꾼이라는 말이 있나? 야곱이 에서를 속였다는 말이 있나? 없다. 왜 그런 관점이 생겼냐? 우리는 도덕을 중시하는 도덕적 존재이다. 그러다 보니까 야곱을 도덕적 관점에서 본다. 얍복강에서 회개하고 깨져서 변했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변했다는 얘기도 없다. 성경을 선입견을 갖고 읽으면, 메시지의 핵심을 놓친다. 가슴으로 읽는 성경에서 야곱을 엄청나게 변론했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장자의 명분을 뺏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했고. 이삭 때는 이미 제사의 종교가 시작되었던 시점이다. 에서는 이방여인 둘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것은 이방 종교에 탐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사냥하러 다니고 그날도 허기져서 야곱이 붉은 죽을 쑤고 있는데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한다.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만홀히 여겼다. 그는 스스로 버렸다. 두번째 가서 에서인 척하고 복을 다 받았다. 천만에 말씀. 야곱은 안하겠다고 펄펄 뛰었다. 내가 복은 그만두고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거부한다. 그랬더니 리브가가 내가 책임지겠다며 그를 들여 보낸다. 리브가가 어떤 사람인가? 세상적인 여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와서 얘기할 때, 아브라함에 대해서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아들이 장가가고 싶다고 하니 그 기회를 단번에 잡는다. 리브가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 중심이다, '하나님 축복은 한번 주고나면 무를 수 없다.에서에게 그 축복이 돌아가면, 돌이킬 수 없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거리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선택해서 그 줄기를 끌고 가시는 분이다. 가인, 아벨, 셋의 흐름이 다르고, 이삭과 이스마엘의 흐름이 다르다. 리브가가 볼 때, 에서는 그 믿음의 계대를 이어갈 자가 아니다.

20년 만에, 14년 아무 것도 못 받고 일하고 어린 자식과 같이 나올 때에 라반이 사람들을 데리고 뒤쫓아 온다. 하나님이 막으셨다. 삼촌이 왔을 때 야곱이 기가막힌 이야기를 한다. 자기 외삼촌, 내가 무슨 잘못 했습니까? 내가 외삼촌의 양 떼 중에서 숫양 새끼를 먹어 본 적이 없고 양이 새끼를 낳을 때는 밤 잠을 못자고 고생한 이야기를 신세한탄처럼 한다. 보세요. 표범의 반점을 바꾸는 게 쉽지 사람의 성품을 바꾸는 것 쉽지 않다. 남 속여 먹기 좋아하는 사람 끝까지 속여 먹는다. 남에게 가슴에 멍드는 것 하는 좋아하는 사람 끝까지 안바뀐다. 야곱이 처음부터 사기꾼이었면 이 말은 사기꾼이 할 말이 아니다.

얍복강에서 성경 어디를 잃어봐도 그가 회개했다는 얘기가 없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다. 야곱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을까를 고민했다. 그게 야곱이다. 우리가 너무 성경을 우리 방식으로 읽고 있다. 도덕적인 얘기만 꺼내서 하는데 그게 무슨 복음이 되는가? 성경을 가슴으로 읽어보자. 바른 관점을 가지면 복음적인 메시지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설교를 듣고 나서도,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모르게 된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 매력이 사라지면 교회에 있을 이유가 없다. 세상이 더 좋아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