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Photo : 해드림 출판사)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조선 선교사 하위렴(William B. Harrison)의 선교행전, 백종근 지음

구한말 열강의 침탈에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지던 조선에 들아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호남 선교의 기틀을 다진 남장로교 선교사 하위렴(William B. Harrison)의 선교 행적을 전기형식으로 기록한 책이 올해 7월에 출간됐다.

1866년 켄터키 주 출신의 하위렴 선교사의 일생을, 한 순간 한 순간 그가 밟아 온 선교의 여정을 따라가며 기록하고 있는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남북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기 전, 미국 남부로 거슬러 올라가 하위렴 선교사를 비롯해 미국 남부 장로교 선교사들의 형성과정, 그들이 지구 반대편에 조선이라는 먼 땅으로 건너와 보여준 헌신과 희생들을 샅샅이 살피며, 그들의 헌신이 한국의 복음화 과정의 밑거름이 되고, 뿌리가 되었음을 그려낸다.

백종근 목사가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의 증조부 백낙규 장로의 개종 과정을 좇으면서부터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위렴 선교사의 행적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호남선교의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테이션의 효율적 운영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늘 무심함에 가려지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이 가려져 있던 선교사들에게 눈을 돌리고자 이 책을 썼다.

경술국치, 일제식민통치를 겪은 암울한 시대, 선교를 위해 조선 땅을 밟았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남긴 삶의 발자취는 그 어두운 시대를 한 줄기 빛처럼 영롱하게 비춘다.

일제가 국권 침탈의 손길을 뻗어가는 가운데, 하나님은 남북전쟁이 휩쓸고 간 미국 땅에서 이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향한 선교의 불씨를 점화하고 있었다.

하위렴 선교사, 1866년 켄터키 주에서 출생한 그는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당시 대학가를 휩쓸었던 학생자원운동(SVM)의 물결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한 하위렴은, 거의 과정을 마쳐 가던 의과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1984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까지 켄터키에서 짧은 기간 목회한 후, 1869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요코하마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 제물포를 거쳐 한양 서소문에 도착하기까지 1달이 넘는 여정이었다.

하위렴은 내한한 지 6개월 만에 전주로 배치되어 사역을 시작한다.(1896년) 그가 전주에 부임하기 2년 전인 1894년,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에 무혈입성이 이루어졌고, 그가 부임했을 때, 이곳에는 농민군과 관군의 치열한 공방전의 흔적이 아직 가시지 않아 처연함이 감돌고 있었다.

1897년 3월, 이삿짐을 푼 하위렴은 초가집을 진료소로 개조하고,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출범 예배를 드리며 본격적으로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다음해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결혼한 후 본격적으로 복음 사역에 전념하며, 신흥학교를 설립한다. 그러나 1903년 6월 아내가 발진티프스로 41세 젊은 나이로 영면하면서, 전주 지부 분위기가 가라앉자, 내한 선교부에서는 하위렴과 군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전킨 선교사의 사역지를 서로 교체함으로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했다.

1904년 군산에 부임한 하위염은 스테이션 조성공사를 진행하며, 부위렴(William F. Bull)선교사, 알비(Alby E. Bull) 선교사, 어아력(Alexander M. Earle) 선교사, 다이샤(Julia Dysart), 다니엘(Thomas H. Daniel)( 선교사 등과 팀사역을 통해 다양한 사역을 감당했다. 점차 곳곳에 교회가 빠르게 증가했지만 목회자 수는 그 증가폭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를 고심한 끝에 나온 해답이 대사경회(Mission Training Class), 중사경회(Station Training Class), 소사경회(Bible Class in the Outstation)를 개최였다. 

이 책의 저자가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의 성장에 사경회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듯, 호남지역 선교에 사경회가 차지하는 역할은 지대했다.

1908년 내한 선교사 에드먼즈(Margarret J. Edmunds)와 재혼한 후, 1909년 안식년을 마치고 복귀한 하위렴은 목포 양동교회에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하며 목포 스테이션 조성공사에 착수한다. 한편으로는 그의 전임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보는 일도 놓칠 수 없었다. 저자 백종근 목사는 그의 순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인용했다.

"1911년에만 하더라도 강진과 장흥을 21일 동안 288km를 여행했는데 48km는 배로 다녔고 48km는 말을 탔으며 나머지 192km는 걸어서 다녔다. 그는 순회 일정 중에 갑작스럽게 닥친 한파로 추위에 떨기도 했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돌발적인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中 

"언젠가는 순회하다가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뛰어오르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너무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땅바닥에 팽개쳐진 채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일어나 짐을 챙기고 주위를 둘러보며 안심은 했으나 머리를 땅에 찧던 순간을 생각하면 도저히 다시 올라탈 용기가 나지 않아 고삐만 붙들고 다음 순회지까지 25마일 넘는 여정을 걸어서 가기도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경험 중의 하나는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배를 타고, 거의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가르며 4시간이나 떨었던 적도 있었다."- W.B. Harrison, "Gathering the sheaves at Mokpo" 中 

또한 저자는 한국선교(The Korean Mission Field) 1916년 6월 호 12권에 실린 해리슨(W. B. Harrison)의 “The Kunsan Men’s Bible Institute”라는 글을 인용해, 군산에서 진행된 사경회의 모습을 생생히 담고 있다. 당시 사경회에서 출제된 시험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1.마가는 예수님을 보았는가? / 2. 마가복음에는 얼마나 많은 비유가 있는가? / 3. 마가복음에는 얼마나 많은 기적이 실려있는가? / 4. 메뚜기를 먹은 사람은 누구인가? / 5. 몇 사람의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았는가? / 6. 누가 세례 요한을 처형했는가? / 7. 어디서 얼마나 오랫동안 5,000명이 빵을 먹었는가? / 8. 언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셨나? /9. 4,000명을 먹이고 얼마나 많은 떡 광주리가 남았는가? …19. 가상칠언 중 마지막 말씀은 무엇인가? / 20.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은 무엇인가?

교인들은 6~5개 반으로 나누어 하루에 3시간씩 10일에 걸쳐서 성경공부를 했으며, 소사경회의 경우 5일간씩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 10회 정도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초기 한국교회는 말씀의 터 위에 기초를 닦았음을 보여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자세로 언어도, 문화도 낯선 타국에서 32년 복음을 위한 행전을 멈추지 않었던 하위렴은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인 1928년 7월 미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그로부터 2달 뒤인 9월 22일 켄터키 루이빌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선교의 발자취는 복음의 씨앗으로 조선 땅에 뿌려져 오늘까지도 그 열매를 맺고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짐으로 조선의 수 많은 영혼들을 살린 하위렴 선교사의 삶은 교회가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림으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좁고 험한 길이 아닌, 넓고 편한 길, 낮아지는 길이 아니라, 높아지는 길을 추구하는 크리스천이 늘고 있는 이 시대, 깊은 반향을 남기며, 크리스천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