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방법이 아니라 바른 방법
여호수아 2장 12절-24절

달라스 큰나무교회 김귀보목사
(Photo : ) 김귀보 목사

인간은 본성상 어려운 것보다 쉬운 걸 좋아한다. 힘든 것보다는 편안한 것을 추구한다. 물론 정말 가끔씩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지다. 하지만 쉬운 방법, 빠른 방법, 재밌는 방법이 인간의 욕구와 잘 맞다. 그래서 어려운 것을 쉽고 빠르고 재밌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인기를 얻고 일타강사(일등스타강사)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쉬운 방법이 아니라 바른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쉽고 빠르고 재밌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를 죽이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고, 오래참음과 인내를 통해서 좁은 문을 통과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는 씨가 바로 나무가 되지 않는다.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비바람과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튼튼한 나무로 자란다. 사람들의 인생도 지름길이 없다. 거쳐야하는 과정을 다 거쳐야 건강하게 자라고, 성숙하게 완성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실패하고, 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른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욕구와 맞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바알 숭배였다. 바알 숭배를 그냥 종교로 보면 안된다. 바알 숭배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과 경제적인 유익과 육신의 쾌락이 집약되어 있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바알 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어내지 못한 것은 바알숭배가 자신들의 욕구와 너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런 바알숭배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라합이다. 바알을 섬기는 신전의 기생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이런 라합이 자기에게 닥쳐온 심판과 죽음의 위기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구원을 얻었다. 라합의 이야기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지금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다. 강 건너편에 있는 헤스본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멀지 않은 장래에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것이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 시기가 점점 더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전쟁이 다가오고 죽음이 임박하다고 느끼면 평상시처럼 살면 안된다. 자다가도 깨어나야 한다. 편안히 살다가도 전쟁의 나팔이 불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 지금 당장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주님이 오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이 처음보다는 가까워 졌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에 주님이 재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죽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과 더 가까워지기 보다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

라합은 임박해 오는 전쟁과 죽음의 위기를 느끼면서 구원 받기를 갈망했다. 구원을 갈망했던 라합에게 두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내신 구원의 사자와 다를바가 없었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정탐군과 라합사이에 긴 대화가 오고갔다. 그 중에 하나가 11절이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1) 라합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사건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고, 참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했다. 구원의 사자로 온 두명의 정탐꾼에게 라합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오늘 본문 12절은 정탐꾼과 라합 사이에 대화의 결과로 나온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라합이 자기와 자기 가족을 살려주겠다는 증표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을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 가족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장면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바울을 만난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고백이다.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0-31)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고 난 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1:37-38)

이 둘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구원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방법이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죄의 고통 앞에서, 사탄의 저주와 재앙 아래에서 구원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생명을 주는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유를 주는 이름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문제, 어떤 고통, 어떤 저주 아래 놓여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를 구원하신다.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1-2)

구원을 간절히 바랐던 라합에게 구원의 방법이 제시되었다. 18절과 19절을 보자.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붉은 줄이다.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고 가족들이 모두 그 집 안에 있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 밖으로 나가면 죽게 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유월절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해가 지고 어둠이 임하고 죽음의 사자가 집집마다 돌면서 모든 생명체의 장자를 죽일 때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서 죽음을 면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붉은 죽을 매달고 그 집안에 있으면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들이 죽을 때에는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유월절날 잡은 양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상징한다. 이와같이 라합이 창문에 내린 이 붉은 줄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상징한다. 붉은 줄을 내린 집 안에 있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번째, 붉은 줄을 달아 내린 집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두번째, 전쟁이 일어나고, 죽음의 공포가 덮쳐올 때 도망가지 않고 그 집 안에 머물러야 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도망쳐야 한다고 외쳤다. 이때 같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때 구원의 약속을 믿고 두려움을 이기고 그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 빠르고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도망가는 것이다. 바른 방법은 무엇인가? 약속을 믿고 그 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 구원의 방법은 누가 제시하신 것인가?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다.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변한 적이 없으시다.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짐승의 피를 흘린 가죽옷,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 모두가 하나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을 방법과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이만희, 이재록, 정명석 다 가짜다. 쉬운 방법, 빠른 방법, 재밌는 방법,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을 이야기 하고 말해도 다 가짜다.

구원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분은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실 수 있는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라합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묻고 그대로 따라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이 창문에 내린 붉은 줄은 정탐꾼을 달아서 내린 줄과 같은 줄일까? 다른 줄일까? 다른 줄이다. 라합이 정탐군을 달아내린 줄은 히브리어로 <헤벨>이라고 부른다. <헤벨>은 줄을 여러 겹으로 꼬아서 만든 단단한 밧줄이다. 그런데 라합이 벽에 내걸은 붉은 줄은 히브리어로 <후트>라고 부른다. <후트>는 리본이나 천으로된 줄을 말한다. 정탐꾼을 달아내린 줄은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단단한 밧줄이고, 창문에 매달아 놓은 줄은 눈에 잘 보이기 위한 줄이다.

그럼 정탐꾼과 라합 사이에 의미가 있는 줄은 정탐꾼을 달아내린 밧줄인가? 천으로 만든 붉은 줄인가? 정탐꾼을 달아내린 밧줄이다. 라합이 붉은 줄이 아니라 정탐꾼을 살려준 밧줄을 창문에 매달아 놓으면 살 수 있을까? 그걸로는 살 수가 없다. 아무리 이 줄 기억나지 않어? 내가 이 밧줄로 당신들을 살려주었다고 이야기 해도 소용없다. 붉은 줄을 내려야 구원을 얻는다. 구원의 방법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다.

목회를 하다보니 오래된 신자(또는 모태신앙)와 새신자의 다른 점을 종종 발견한다. 새 신자는 가르쳐준대로 한다. 예배하라면 예배하고, 기도하라면 기도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빨리 경험한다. 기도 응답을 빨리 받는다. 그런데 모태신앙, 오래 된 신자들은 가르쳐줘도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해야할 것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자기가 정한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을 경험할 방법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녀의 특권을 주셨다. 기도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방법이 없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에 약속한 복을 받을 방법은 없다. 섬김과 나눔과 봉사를 하지 않고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경험하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나는 바쁜 사람이니까, 나는 돈을 많이 내니까 기도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고, 봉사와 섬김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생각이다. 신앙은 내가 믿고, 내가 고백하고, 내가 헌신하고,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면제도 대신해주는 것도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인격적인 관계와 작용이다.

라합은 하나님이 주신 방법을 따라서 구원을 경험했다. 21절을 보자.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라합은 정탐꾼이 떠난 직후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가 있다. 라합은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의 약속을 받은 순간부터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렸다. 이때부터 구원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여리고성이 함락 될때 완성되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내린 라합은 전쟁의 소식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붉은 줄을 보면서 구원을 얻을 때를 기다렸다. 전쟁과 심판의 소식이 라합에게는 구원의 소식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은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할 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그 구원은 완성이 된다. 이 두 사이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라합이 창문에 내린 불을 줄은 이번에는 <후트>라고 부르지 않고 <티크와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티크와트>라는 단어 안에는 소망, 희망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라합은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았다는 말이다.

믿음은 소망이다.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하실 예수님을 향한 소망이다. 이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고 하나님을 믿게 하셨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 생활을 의무로 한다. 예배도, 기도도, 말씀을 읽는 것도 의무로 한다. 하나님이 주신 쉽고 가벼운 멍에를 무거운 짐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기쁨을 찾지 못하고 세상에서 기쁨을 찾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고 바알을 섬기는 것에 기쁨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 축복의 땅에서 실패하고 쫓겨났다.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의무로 신앙생활 하지 말고, 소망으로 신앙생활 하라. 쉬운 방법, 빠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으로 살아라. 모르면 하나님께 물으라. 답답하면 하나님께 나아오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라. 하나님 때문에 소망과 힘이 나는 경험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