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왜(why)'라는 질문은 '무엇(What)'과 '어떻게(How)'의 근간을 이루는 말이기에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 그 순간은 잃어버렸다고 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에 있어 '왜'라는 질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뛰어넘고 '무엇' 또한 "어떻게' 에만 몰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종교 철학자 정재현 교수는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우리 자신의 '왜'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다 보니 마치 아예 없는 듯이 '무엇'과 '어떻게' 에만 골몰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더 피곤하게 했을 수 있다."고 꼬집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방교회(Western Church -Catholic)를 벗어나 소위 말하는 개신교(Protestant)가 시작되며 불린 찬양 중 가장 대표적인 찬송은 우리가 종교개혁가라고도 말하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종교개혁 506년째를 맞이한 올해, 필자는 이 찬송과 더불어 종교개혁을 통한 예배와 찬양의 변혁과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날 예배에 왜(Why)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이란 주제를 가지고 95개 조항을 만들어 그가 사역하는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붙여놓았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이것은 개혁의 불을 지피며 개신교 태동의 시발이 된 계기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그 주제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이나 이에 관계된 관련자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다른 일반 사람들에게 퍼트려서 무엇을 하려거나 교황을 공격하려는 의도 또한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2주도 채 안 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이 조항이 번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루터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중세교회에 있어 문제가 되었던 가장 큰 화근덩어리는 면죄부(Indulgences)였습니다. 급기야는 돈으로 면죄부를 사서 구원에 이룰 수 있는 추악한 논리로까지 번져가게 된 것입니다. 자연히 예배의 중심이 성찬식이 되었습니다. 이때 알아들을 수 없게 라틴어로 성경을 읽고 성찬을 강조함으로 성직자의 권위를 강조한 것은 예배를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때 예배에서 드러나는 것은 성직자의 권위였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부당함을 알고 루터는 하나님의 권위를 말씀의 원리대로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에서 '왜(Why)'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이란 95개 조항(무엇 What)을 만들어 방법론적으로 당시 깨어있는 신학자들과 토론(어떻게 How)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배의 개혁이 종교개혁의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였습니다. 그동안 예배에서 회중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을 바꾸어 회중들로 하여금 입을 열어 하나님을 송축하게 하고 말씀을 읽고 이해하게 되는 변화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자들이 행해야 할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 의무를 빼앗겨 버린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며 개혁하게 된 마틴 루터가 성공적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던 큰 키(Key)는 음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찬송 관과 찬송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종교개혁가라고 하는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이것은 1527년에 루터에 의해 만들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불리게 된 것은 1529년이었습니다. 

이 곡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역자인 레온하드 카이져(Leonhard Kaiser d. 1527)가 루터의 사상을 따른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의 순교를 추모하며 만들어지게 된 찬양입니다. 루터는 당시 카톨릭 교회를 향한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저항으로서 그의 결백성과 정당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 (왜 why)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 곡의 가사는 시편 46편의 내용을 가지고 개사(Paraphrase) 한 것을 당시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멜로디를 그대로 도입한 것(Contrafactum)입니다. 당시 루터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뢰하는 자의 힘과 피난처 그리고 도움이 되시기 때문에 지속되는 극한 시련과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이 곡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루터는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찾기 위해 '왜'라는 질문은 너무나 명확했고 너무나 옳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바른 자리로 돌려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500여 년이 흐르고 있는 오늘날 개신교가 예배와 찬양에 대해 다시 왜(Why)라는 원초적 질문을 신중하게 던져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이 본질적 개혁 사상과는 너무나 비뚤어진 예배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요소들은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뒤로한 채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 집착되어 현대 문명의 도구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그것들이 주는 이로움이 무대의 예배지도자들을 더 화려하게 만드는 모습은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 화려함 속에서 정작 높이 드러나야 할 하나님은 그것을 위한 들러리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또한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현대 문명이 주는 편리함이 예배자들을 나태하게 만들어 회중들을 종교 개혁 이전의 예배자들처럼 구경꾼으로 다시 몰락시키는 모습은 없는지 이 또한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에 있어 '왜'라는 질문을 뛰어넘고 '무엇' 또한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어떻게' 에만 몰두하려는 모습을 버리기 위해 두 가지 를 가슴 깊이 담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의 삶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에 앞서 '왜'라는 질문에 민감해야 합니다. 두 번째, 그 '왜'라는 질문 안에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기반이 된 답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마음에 담아야 할 중요한 고백은 "하나님 내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매 순간 우리의 가슴에 요동치게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