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발전 덕분에 이민 열의 줄고
미국 과대평가 인식도 많이 불식
이민 추세도 중상류층 중심 변화
한인교회 역할 중요성은 더 커져
네트워크 허브로만 인식, 아쉬움
복음 전파 명령 외면했는지 고민  

◈미국 내 한인 이민자: 1970-80년대 아메리칸 드림에 도전한 한국인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그려내는 미국 내 한인 이민자 자녀들의 치열하고 고달픈 삶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미국 내 한인교회와 맺고 있는 관계, 이런 것들이 지금으로서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와 주거 여건이 크게 개선되면서, 이전과 달리 한국인들이 굳이 고생하며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미국 내 한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유대감과 관심이 많이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19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이른바 꿈의 이상향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당시 미국은 경제, 문화, 교육, 인프라 측면에서 한국을 압도하는 선진국이었고, 지금처럼 마약이나 동성애 문제가 심각하지도 않은 나라였다.

후진국에서 개도국으로 겨우 발돋움한 군사독재 국가 한국에 살던 이들 눈으로 볼 때 미국이 이상향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미국이란 한국 기독교 신앙의 발원지(한국 개신교 선교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이자, 삶의 모든 측면에 청교도적 가치가 살아 숨쉬는 신앙을 위한 터전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1970-80년대 미국 이민은 말 그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들의 처절하고 절박한 도전, 하지만 정착에 성공하면 한국에 남아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과실을 거둘 수 있는 도전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미국 이민을 향한 열기가 뜨거웠고,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얻기 위한, 그리고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을 얻어내기 위한 수많은 도전들이 이루어졌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 등장하는 대니 조(스티븐 연 분), 폴 조(영 마지노 분) 등 한국계 이민 2세대 캐릭터들은 1970-8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을 위해 생존투쟁을 벌여야 했던 한인 이민자들의 자녀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절반쯤은 한국인이면서 절반쯤은 미국인인 그들의 혼란스러운 정체성과, 미국 사회 내부에서의 불분명한 위치는 그들의 마음 속에 근본적인 불안과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성난 사람들
▲미국 내 한인 이민자 자녀들의 불분명한 정체성과 불안한 사회적 지위를 세밀한 연출로 묘사한 <성난 사람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내 미국에 이민을 간 친지들이 있는 가정이 워낙 많아 미국 내 한인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도가 지금보다는 훨씬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1993년에는 미국 내 한인 가정의 갈등과 고뇌를 묘사한 <억새 바람>같은 드라마가 제작될 정도였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내부적인 발전 덕분에 1970-80년대처럼 미국 이민에 열의를 가진 이들이 줄어들었다. 과대평가된 면이 없지 않았던 미국에 대한 인식들이 1990년대 이후, 특히 1992년 LA 폭동 이후 상당 부분 불식되기도 했고, 한국도 경제성장과 민주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이전처럼 맨몸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도미하는 이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 추세가 주로 더 나은 교육환경과 전문직 종사자들의 미국 주요기업 진출을 위한 중상류층 중심의 이민으로 변화되면서 미국 내 한인과 그들의 자녀 세대들에 대한 관심 역시 크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는 다시금 변화할 기미가 보인다. 한국의 경제 성장세가 최고 정점을 찍고 향후 장기 저성장의 현실을 눈앞에 둔 현재, 다시금 국내에서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 대한 이민 열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다.

특히 젊은 층에서 능력과 기회만 있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갈망하는 이들이 급증하는 상황이라서, 미국 내에서 정착하려 분투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삶과 사회적 위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조금씩 고조되고 있다.

◈미국 내 한인교회: 복음화의 전초기지인가, 아니면 친교와 인맥 형성의 현장인가

이런 상황에서 한인교회가 맡아야 할 역할의 중요성이 더 커져가는 추세이다. 온라인-모바일 네트워크의 발전 덕분에 예전보다는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미국 내에서 한인교회는 미국 내 한인들의 인맥과 친교를 지탱하는 주된 근거지 역할을 맡고 있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주요 스토리가 한인교회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다만 <성난 사람들>의 한인교회 묘사에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한인교회에서 실제 이루어지고 있는 복음화의 노력이 대부분 배제된 채 순전히 친교의 장,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 허브 정도로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진정성 있는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이 교회 내에서 청년부 리더로 인정을 받으며 활동하는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애초 반기독교 기조를 표방하는 넷플릭스에서 그나마 교회를 인간적인 정감이 살아있는 곳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인교회에 대한 드라마의 묘사가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이라는 점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한인교회가 서사의 중심 무대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라 더욱 그렇다.

작품에 등장하는 중형 한인교회 Living Glory Church의 청년부 새신자로 입교한 주인공 대니 조는 실상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진정성 있는 믿음이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결국 교회 내에서 선한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여 청년부의 리더를 맡는 동시에 찬양집회 인도도 맡게 된다. 

성난 사람들
▲작중 진정한 회심의 경험과 신앙심 없이 그저 교회 내에서 선한 이미지를 구축하여 청년부 리더와 찬양인도를 맡게 된 대니 조.

게다가 원래 청년부 리더를 맡고 있던 에드윈(저스틴 민 분) 역시 깊이있는 신앙을 추구하기보다는 또래 집단 내에서 인정을 받고 주도권을 잡는 데에만 주력하는 인물이다. 

이로써 이 드라마는 한인교회가 복음에 대한 믿음 없이도 교회 내부에서 인간관계만 잘 맺어 놓으면 훌륭한 신앙인으로 인정하는 곳으로 묘사한다.

분명 <성난 사람들> 속의 한인교회 묘사는 한인교회를 바라보는 한국과 미국 대중의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기는 하다.

한인 이민자들 사이 온갖 친분과 이권, 그리고 갈등이 중첩되면서 미국에 이주한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대한 환상과 환멸을 가장 민감하게 체감하는 공간, 그것이 세간에서 바라본 한인교회의 대표적 이미지일 것이다.

작중 주인공 대니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Living Glory Church의 청년부 찬양집회에서 괴로움을 토로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그나마 교회가 가진 심적 위로의 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을 수 있도록 기도에 힘쓰는 목사님의 모습 역시 한인교회가 가진 복음화 기능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장면을 지나고 나서 대니의 삶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는 성실한 교인이자 책임감 있는 청년부 리더 행세를 하지만, 뒤로는 사기와 범죄를 지속하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로써 <성난 사람들>은 한인교회가 겉으로만 복음화의 능력을 갖췄을 뿐 사실상 한인 청년들에게 신앙심과 도덕적 양심을 일깨워주는 힘을 상실했으며 오로지 친교와 인맥을 통한 이권을 통해서만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풍자하고 있다. 

성난 사람들
▲순간적으로 교회 찬양집회에서 감동을 받지만,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기와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주인공 대니.

이처럼 한인교회가 순전히 기능적인 친교의 현장 혹은 이권과 욕망이 뒤얽힌 갈등의 현장으로 비쳐지게 된 데에 교회 측 책임이 전혀 없지는 않다.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한없이 지친 이들에게 천국과 내세를 향한 진중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보다는 값싸고 즉각적인 위로의 메시지, 즉 한국교회 특유의 기복적인 설교와 메시지 전달에 주력한 점이 한인교회들의 큰 실책 중 하나일 것이다.

<성난 사람들>에 묘사된 한인교회의 명과 암은 미국 내 한인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들이 품고 있는 커다란 고민거리를 일깨워준다. 복음이 바탕이 된 친교인가? 아니면 교회의 외형 유지를 위한 친교인가?

교회에 대한 세간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필요도 있지만, 교회들이 이런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데만 몰두하다, 정작 복음 전파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