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지어 놓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원하셨으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두지 않았어야지, 그런 것을 만들어놓고는 이것을 따 먹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제한하고 결국 인간을 타락하게 하였으니, 인간이 지은 죄의 책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도록 원인 제공을 한 하나님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악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서 주신 시험의 과실도 아니고, 인간을 골탕 먹이려고 주신 것도 아니며, 인간이 실수하여 타락하는 것을 보며 즐기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배려하여, 미리부터 깊이 생각하고 만드신 사랑의 선물이다.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생명 나무만 만들어 놓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삶은 어떠했을까?

에덴동산 안에 있는 모든 과실들을 따먹으며 살 뿐만 아니라, 생명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서 영원토록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였더라면, 그리고 금지된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개나 돼지와 똑같은 수준의 짐승에 불과할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먹는 것이 금지된 나무가 없었기에, 따먹을 것인가 따먹지 않아야 할 것인가,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 할 것인가 고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렇게 일반적인 동물의 수준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는 형상으로, 선택하며 결정할 수 있는 인격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여 살아갈 수 있는 모습으로, 그리하여 자유 의지가 있고 존엄성이 있는 도덕적인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바로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인간에게 주신 한계였지만, 이것은 곧 인간에 대한 자유의 근거였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이다.

물론 그렇게 사랑과 복으로 배려해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에 대한 자유 의지를 첫 사람 아담은 잘못 사용하여 타락했지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특별한 배려이자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금단의 열매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이 타락 했겠나 아니면 타락하지 않았겠나? ‘타락 안 했다’고 표현해서는 안 되고, ‘타락할 수 없었다’라는 표현이 더 바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금단의 열매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가 없었다면, 인간도 여타 짐승과 똑같은 짐승으로, 선택권도 없었고 자유의지도 없었으므로 타락이라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도 개나 소와 같은 동물이 타락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금단의 나무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는 유일한 성품은 본능뿐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짐승에 불과하므로, 타락한 호랑이도 없고 의로운 호랑이도 없다. 타락한 파리도 없고 의로운 파리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금단의 열매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와는 무관하게 창조된, 먹고사는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지만 타락한 동물은 오직 인간밖에 없다. 또 타락해 가는 동물도 인간밖에 없다. 거짓말하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죄 짓고 불의하게 사는 동물도 인간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잘못을 뉘우칠 줄 알고 회개할 줄 알고, 그래서 의로워지는 동물도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여타 동물과는 다른 수준으로 창조하시면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주셨건만, 인간들은 그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고 죄 아래, 죽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예수 그리스도, 둘째 아담으로 이 일을 다시 있게 하여 우리를 대속하시고,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하기 전 그 자리로 우리를 되돌려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드도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를 다시 기대하시고 계신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에게 있어서, 금단의 열매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아담과 하와에게만 주어졌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삶 한가운데 매일 있는 선택과 작정 속에서 선악과는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선 오늘도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선택하고, 바르게 결정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선악과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Yes냐 No냐, 바르게 사느냐 불의하게 사느냐 하는 생의 순간순간마다 바르게 결정할 수 있는 기회와 잘못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제 '선악과'라는 주제를 놓고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불순종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사용해 왔나?

이제 선악과는 에덴동산에서 뿐 아니라, 태초 이래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에 상징적으로 늘 존재한다.

날마다 한 컵의 커피물이 주어졌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당시에도, 어느 한 편은 다 마셔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 죽었지만, 다른 한편은 반 컵의 물로 사람이기를 결단했고 끝내 살아났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에게 복과 사랑과 은혜로 주신 선악의 의지를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써 주신 복을 누리고, 더욱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