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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여학생들이 가장 선호한 서양도서, ‘빨간머리 앤’

기독일보

입력 Oct 04, 2019 09:35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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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생들의 서양도서 접근성 및 세계관 변화의 물꼬

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정교진 박사
정교진 박사

들어가며

몇 년 전 어떤 메이저 언론사에서 재미있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국 대학생들의 하루 평균 인터넷 사용시간은 133분, TV 시청은 61분인데 반해, 책을 읽는 시간은 평균 30분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응답자의 21.4%는 '전혀 안 읽는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OECD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은 한 달에 6.6권, 일본은 6.1권, 프랑스 5.9권, 중국 2.6권의 독서량에 비해 한국인들은 1.3권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제연합 회원국 192개국 중 166위에 속하며 OECD 회원국 중에서는 최하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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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19세 이상 성인들의 1년 독서량이 평균 8.3권으로 나타났다. 이는 평균 28.6권인 학생들(초·중·고)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치이다. 학생들 중에서는 초등학생들의 독서량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1년에 28.6권을 읽은 학생이 67.1%나 되었다. 즉, 10명 중 7명이 1년에 29권 정도(한 달에 2.4권)를 읽는다는 의미다. 반면, 중학생들은 18.5%로, 고등학생은 8.8%라는 매우 낮은 수치를 보였다. 위의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에서 가장 독서량이 많은 연령층은 초등학생들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떠한가. 필자가 북한출신 탈북주민(북한에서 대학졸업, 남한에서 교수직 및 전문직, 대학원생)들 7명을 인터뷰한 결과, 북한에서도 성인들보다는 아동(청소년 포함)들이 독서량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에서의 독서 양상, 강제성 및 자발성

북한에서 독서량이 높은 연령대가 아동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제가 있다. 책을 읽는 것이 강제성을 띠느냐, 자발적이냐로 나뉠 필요가 있다. 그 구분은 대략 이렇다. 북한 국내도서들을 읽는 것은 대부분 강요에 의한 독서라고 볼 수 있다. 북한 당국은 인민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김일성의 천리행군(1923.3.16.부터 13일간)을 따라 배우는 <배움의 천리길> 답사행군을 진행한다. 또 배움의 천리길 근위대를 조직하여 9개월 남짓 기간에 한 사람이 평균 1만5천여 페이지 책 읽기 운동을 시행한다. 물론, 이때 읽어야 하는 책은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 '김일성 전집', '김정일 선집', '항일 빨치산들의 회상기' 등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을 그린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와 별도로 북한 학교들(초·중·고·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만 페이지 책 읽기 운동>이 보편화 되어있다. 이 운동은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던 1961년 3월 25일, 김정일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김정일이 <청소년시절에 혁명적인 소설을 많이 읽자>(1957), <책읽기를 생활화, 습성화하자>(1960), <조선혁명에 필요한 지식을 소유하여야 한다>(1960), <대학생들은 다독가, 정열가가 되어야 한다>(1960), <만페이지 책 읽기운동의 봉화를 높이 들자>(1961), <실력을 높이는 비결은 책을 많이 읽는데 있다>(1961) 등의 자신의 여러 논문과 담화들을 통해 학창시절에 배우고 또 배워 조선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혁명인재로 튼튼히 준비할데 대해여 강조하였다고 하면서 그 실천적 모범으로 김정일이 5만 권의 도서를 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빛나는 예지, 끝없는 정력으로 5만권의 도서 독파" 『주체예술의 위대한 년륜』 , 2.16예술교육출판사, 2002)

<일만 페이지 책 읽기 운동>도 읽어야 할 책들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위대성에 대한 책들로 제한된다. 이러한 양상은 강제성을 기반으로 한 독서이며 독서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발적인 독서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탈북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필자는 외국도서를 읽는 것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인터뷰하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도서를 가장 많이 접하는 세대를 대학생들로 봤었다. 그런데, 인터뷰 결과는 아동들이었다. 위에서 의 북한에서 가장 많은 독서량을 보이는 연령대가 아동들이라는 것 또한, 외국도서 영역에 제한된 것임을 밝힌다. 이 사실은 필자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북한을 폐쇄되고 통제된 사회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일반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민 모두를 대상으로 해서 나타난 결과물이 아니기에 그 신빙성은 높지 않지만, 인터뷰에 응한 7명(남2, 녀5)의 탈북민 모두는 자신이 아동 시절에 외국도서를 가장 많이 읽었다고 답하였다.

5.25 교시, 주체문학의 광풍으로 외국도서 전소(全燒)

중국에 문화대혁명(1966~1976)이 있다면 북한에는 <5.25 교시>가 있다. 이 교시는 김일성이 빨치산 아류인 갑산파(세력)를 제거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비밀회의, 1967.5.3.~8.))에서 비롯된 것이다. <5.25 교시>는 반수정주의 투쟁이라는 구호 아래 대대적인 인테리 제거, 그들의 창조물인 문화에 대한 총공격, 좌경극단주의에 의한 반문화 혁명이다.

이를 기반으로 김일성의 일인독재체제가 구축되었으며 김일성 우상화가 심화 되었다. 이때 기독교의 십계명과 비견되는 '당의 유일사상 10대원칙'이 나온 것이다. 이 10대 원칙은 수령에 대한 신격화, 신조화, 절대화를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실천하게 하는 하나의 행동강령이다.

<5.25 교시> 이후, 주체 문학을 표방하면서 전국적으로 실시된 사업이 바로 '도서정리'이다. 전국의 모든 가정, 모든 직장의 책 페이지가 일일이 검열되는 방대한 사업이었다. 북한주민들이 읽어야 할 책들은 수령 우상화, 항일무장투쟁의 절대화, 계급혁명(반수정주의, 반부르주아)에 관한 도서 곧, 주체 문학뿐이었다. 이 여파로, 모든 외국도서들은 다 전소되어 버렸다. 이 사업은 문학 부문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과학기술에까지 전방위적으로 시행되었고 이것들 앞에 모두 '주체'자를 붙여 버렸다. 이 광풍은 외국인 문화예술인, 과학자, 유학생들도 북한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으며 1975년 중반까지 세차게 불었다.

1970년대 후반, 북한 학생들에게 서양도서 다시 개방

북한에 러시아 도서와 서양도서들이 다시 간헐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좀 더 원활해졌다. 물론, 모든 도서들은 영어번역본이 아니라 러시아 번역본들이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 작품은 한, 두권 이상은 다들 읽어봤다고 답했다. 그 중 <전쟁과 평화>는 빠지지 않았다. 톨스토이 작품은 아니지만 <강철은 어떻게 단련이 되는가> 라는 작품도 다들 읽었다고 하면서 당시, 필독서였다고 입을 모았다.

(이 소설은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오스뜨로프스키의 작품으로 1934년에 초판이 나왔다. 당시에 대표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로서 배경은 우크라이나이다. 이 소설은 가난한 노동자 청년 빠벨 코르차간이 볼쉐비키 혁명을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의 영웅적인 삶을 통해서 사회주의 건설의 당위성을 선전한다. 사회주의 건설에 임하는 주민들의 바람직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0년대의 소련에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어떤 응답자는 러시아 고전은 외국도서 중 C급에 속한다고 했다. 누구나가 읽는 책이며 동시에 강제성은 없지만 북한 당국의 권장도서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서양도서는 B급이며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문학이 A급이라고 한다.

북한 학생들은 서양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서양도서들이 군(郡)도서관, 도립도서관, 시립도서관에 비치되었다. 군도서관은 주로 아동용 도서가 많이 비치되어있다고 한다. 대출도 가능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읽어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북한 여학생들이 가장 선호한 서양도서, '빨간머리 앤'

인터뷰 결과, 1980년대부터 서양 도서(대부분 소설) 중 북한 학생들이 쉽게 접한 책들을 보면,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 어린왕자, 스파르타쿠스, 빨간머리 앤, 톰소여의 모험 등이 있다. 북한 여학생들이 가장 선호한 책은 무엇일까. 하나같이 '빨간 머리 앤'을 꼽았다. 당시, 이 책을 안 읽은 여학생들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으며,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주인공 앤의 소녀 감수성에 공감대를 느껴서 아닐까 라는 두리뭉실한 대답들이 돌아왔다. 당시, 남한의 여학생들도 이 책을 많이들 읽고 또 TV를 통해 만화로 시청했다고 한다. 필자의 아내도 초등학교 시절 이 책과 TV 만화 시청에 흠뻑 빠졌었다.

필자는 북한 여학생들이 이 책을 가장 선호한 이유를 나름대로 찾기 위해 이 작품을 직접 확인해 보았다. 

빨간머리 앤, 북한여학생들에게 무엇을 심어주었나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은 캐나다의 여류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1908년 작품(소설)이다. 내용은 앤 셜리라는 감성이 풍부하고 말이 많은 소녀의 몸과 마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풍부한 어휘력과 감성이 풍부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모두 3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루시(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시골인 에이번리에 대한 낭만적 묘사,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서술이 잘되어 있는 점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이 소설에서는 정치적 수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우울한 시대적 배경 및 사회현상에 대한 문제의식 및 저항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강한 기독교 색채이다. 배경으로 교회가 나오고, 목사도 등장한다.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 기독교인이다. 신앙적인 부분도 직접적으로 표현되는데, 주인공 앤이 주기도문을 외우는 장면과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도 나온다.

이 작품을 파악하면서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북한 당국이 이 소설을 과연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우선, 이 캐나다 소설을 러시아판은 어떻게 나왔으며 또 그것을 번역하는데 많은 수정이 가해졌는가이다. 즉, 기독교적 색채는 다 빼고 무미건조하게 번역하였을까. 이 부분을 다시금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확인하였다. 그런데, 거의 기억해내지 못했다. 한 사람만이 기독교적 배경 및 내용이 크게 삭제되지 않고 실렸던 것 같다고 답했다. 다시금 질문했다. "큰 충격 받지 않았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아니요." 그 답변에 오히려 필자가 충격을 받았다. 북한과는 너무나도 생소한, 딴 나라 얘기인 교회, 목사, 기도가 나오는데 부자연스럽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답변이 돌아왔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미 인정했는데요. 뭘". 더 큰 충격이다. 필자가 집중적으로 물어보니 그땐 자신이 너무 어렸을 때라 잘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렸다. 참고로 이 대상자는 30대 중반으로 현재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크리스천이다.

<빨간머리 앤> 소설에 뚜렷이 나타나는 주인공 앤의 특징은 풍부한 감수성과 더불어 넘치는 상상력이다. 거기에, 자기주관이 뚜렷하며 거침없는 표현력과 자유분방함이다. 통제된 사회에 속에 사는 북한여학생들에게 충분히 동경의 대상이 될 법한 존재이다. 한편, 주인공 앤이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는 모습에서는 총화시간에 자아비판을 하는 자신들을 떠올리며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매우 자연 친화적인 앤을 보면서 그들 앞에 펼쳐진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인들은 미쳐 의식하지 못했었겠지만 '자유라는 것'이 그들 맘속에서 움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북한외부에서 뿐만 아니라 북한내부에서도 북한학생들(주민들) 세계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 월드뷰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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