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다문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평화롭게 공존한다면 진정한 선진화가 이루어진다고 다문화 평화 공존론을 홍보한다.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인권단체들은 단일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편견을 깨기 위해 앞을 다투어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보는 현상을 집중 보도하여 외국인 권익보호에 앞장서고 있으며 이를 위해 꾸준히 법과 제도를 보완해 나가고 있으나 역으로 한국인들이 외국인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현상은 보도를 금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근한 예로 2010년 12월 4일 동두천 염색공단에서 40대 방글라데시 무슬림 M씨가 17세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살해하여 이불에 싸 길가에 버린 사건을 수사하는 중 인권단체에서 항의전화가 쇄도하여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하는데 주류 매스컴에서는 이 충격적 사건에 대해 입을 봉하고 있다. 이는 구글 검색창에 "방글라데시인 여고생 살해"라고 검색해 보면 인터넷을 뒤덮고 있는 사건이지만 주류 매스컴에서 침묵하는 덕분에 국민적인 분노를 피해가고 있다. 덕분에 이제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들의 수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으며 작년 통계에 의하면 농촌 총각의 41%가 외국인과 결혼했다고 한다.(서울신문 2010.7.6) 이제 다문화 사회로 가는 길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며 이미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렇게 정부와 인권단체들이 적극 추진하고 있는 다문화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면 아직도 고리타분한 구시대적 발상을 벗어버리지 못한 미개인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이 인권문제에 관해서는 한국보다 훨씬 앞서가는 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다른 문화를 경시하거나 차별하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체제가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소수의 의견이나 풍습이나 문화 혹은 종교의 추종자라도 자신들의 권리를 만족할 만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선한 마음을 가진 인권단체에 종사하는 분들의 노고가 컸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중에 독일이라는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독일의 국무총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3인방 중의 한 사람인 안젤라 메르켈 여사이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독일에 있는 외국 이주민들의 인권수호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다문화 현상은 우리가 배워야할 현실”이라고 강조하며 조금이라도 이 정책에 도전을 하는 사람은 당에서 추방을 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취해왔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열렸던 G-20 정상회담 참석 약 1개월 전에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다. 포츠담에서 젊은 당원들을 모아놓은 공식석상에서 “독일의 다문화 정책은 철저히 실패했다.” 고 선포했다.(한국일보 2010.10.17) 메르켈 총리는 그것이 이슬람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기사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CSU 당의 제호퍼 당수가 “이제 터키와 아랍에서 이민을 더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슬람 때문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비단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의 보편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스위스에서는 모스크의 첨탑 건설을 금지했고 프랑스나 벨기에에서는 부르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호주에서도 1973년부터 강조하던 다문화 정책을 무슬림들의 난동과 사회 갈등 조장으로 2007년에 포기했다.(뉴데일리 2010.10.26) 그들이 사회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노력한다면 왜 선진국들이 그런 조치를 취했겠는가?

오래 전부터 유럽은 이슬람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사회를 얽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사회복지나 인권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은 쟁점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감히 이슬람을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1) 이슬람은 세계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거대한 세력이라는 점

2) 이미 무슬림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숫자가 많아진 그들의 표를 잃으면 정치인으로서 힘을 쓸 수 없다는 점

3) 대부분이 산유국인 이슬람국가들이 등을 돌리면 국가적으로 이익보다는 손해가 클 것이라는 점

4) 매스컴과 학계에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홍보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반대하는 말을 하면 국수주의자 혹은 민족주의자 이슬람포비아등의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점

5) 이슬람을 잘못 건드려 무슬림들의 표적이 되면 언제 테러를 당할지 알 수 없다는 점 등의 두려움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총리가 폭탄선언을 한 것은 이제 더 이상은 무슬림들의 횡포를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현실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무슬림들에게 최대한의 혜택을 베풀고 만족하게 대우해 주면 왜 그런 과격한 일들을 저지르겠는가? 자업자득이라는 말처럼 거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문제의 핵심을 쌍방과실로 희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근거로 해서, 이슬람권을 변화시키려면 무슬림들에게 서구문화와 민주주의의 인권혜택을 흡족하게 체험케 해주면 이슬람의 모순을 깨닫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슬람권에 대대적인 원조를 해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2001년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와 2005. 7월7일 발생했던 영국 런던의 지하철 테러를 보더라도 그 나라 국적의 무슬림들이 그 나라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살면서도 자신을 길러준 조국에 테러를 가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일부 몰지각한 무지한 광신자들의 행위로 돌려버리려는 이슬람의 홍보 전략에 맞장구를 치면서 조국의 멸망에 촉매역할을 하는 순진한 인권운동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왜 테러범들을 무지한 광신자들이라고 부르는가? 이슬람권에서는 그들의 이름이 영웅처럼 우상화되어 있고 따라가야 할 모델이라고 공공연히 방송을 하고 있다. 심지어는 아랍권에서 시청률이 54~55%나 되는 알 자지라 방송의 설교에서도 최소한 1억이 넘는 시청자들에게 그들은 테러범이 아니라 철저히 헌신된 무슬림들로서 본받아야 할 영웅들이라고 외칠 때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이것은 결코 일부 몰지각한 소수의 광신자들의 견해가 아니라 모든 무슬림들이 따라야 할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방법은 이미 7세기 때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쓰던 방법으로서 꾸란에 분명히 명시해 놓고 있다. 무함마드는 첫째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그 체제는 멸망 시켜야 한다는 것(꾸란9:5, 꾸란8:39)과 둘째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꾸란4:138, 꾸란5:51, 꾸란3:118등) 만일 불신자를 친구로 삼는 자는 믿음이 하나도 없는 철저한 불신자로 취급되어 알라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꾸란3:28) 이런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서양 친구를 사귀는 자기 자식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무슬림 부모의 기사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1978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맺었다가 결국 암살당한 이집트의 대통령 사다트의 경우이다. 대통령을 암살한 칼레드 이슬람볼리는 무슬림들의 영웅이 되었으며 이란에는 그의 이름으로 기념우표까지 나왔고 그의 이름을 붙인 도로까지 등장했지만 그 사건을 명령한 성직자 쉐이크 우마르 압둘 라흐만은 꾸란으로 정당성을 변호하여 처벌되지 않고 석방되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을 철저히 신봉하는 무슬림들은 도저히 타 문화권에서 이교도들을 친구로 생각하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주는 혜택은 받아서 즐기고 누리면서도 그 문화를 파괴해야 할 적대세력으로 생각하며 이슬람 세력이 커지면 무기를 들게 되는 것이며 이는 꾸란에 의한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 때문이다.

그런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무슬림들이 소수일 때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친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무슬림들)은 믿는 자들 대신에 불신자들(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기타)을 친구나 보호자로 삼지 말라. 그렇게 하는 자는 절대로 알라(Allah)로부터 어떠한 도우심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자신을 보호할 예방책으로 할 때는 예외이니라. 결국은 알라께 돌아갈 것이므로 알라를 주의하라.(꾸란3:28 유스프 알리 역)

민주 사회에서 처음부터 소수의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 사회를 정복하기위해서 테러를 가하고 그 문화를 파괴하고자 한다면 즉시 체포되어 처벌될 것이므로 이슬람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다. 이럴 경우에는 타 종교인들이나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도 되지만 그것은 세력을 얻을 때까지만 허용되는 자기보호의 예방책이며 일시적 예외 규정이라는 것이 위에서 보듯이 꾸란을 통한 이슬람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이슬람 인구가 1%가 채 안 되는 나라에서는 이슬람은 원래 평화의 종교라고 속이고 있다

그런데 순진한 사람들이 그들의 위장 전술(타끼야 교리)에 속아서 신학대학에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홍보하는 무슬림 박사들을 교수로 청빙하기도 하고, 교회에서 무슬림 이맘을 강사로 초청해서 교인들에게 위장된 이슬람 강의를 듣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이것이 선진화이며 깨인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열린 자세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자신이 빠질 함정 파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

이슬람을 옹호하는 어떤 이들은 “왜 꾸란의 앞뒤 상황을 무시하고 특정 구절만 뽑아내 임의로 해석하여 이슬람을 모독하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구석에 숨어있는 특정 구절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하며 강조하는 꾸란의 전체적인 맥락이 그렇고 저명한 이슬람의 정통 4대학파(하나피, 한발리, 말리키. 샤피이)의 가르침이 그렇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꾸란에서는 “너희(무슬림들)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이웃(불신자들)과 싸우라”(꾸란9:123)고 명령하고 있으며 “피트나(이슬람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소동)가 사라지고 종교가 오직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꾸란8:39)고 명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신자를 만나면 어디서든지 살해하라”(꾸란9:5)고 명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독실한 무슬림일수록 다른 문화나 종교인들과 융화되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민주주의와 인권이 고도로 발달된 유럽 사회에서 이슬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그 원인을 깊이 생각해보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서양이 다문화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니 무조건 우리도 해야 된다는 주장은 그들이 실패했다면 우리도 실패를 경험해봐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프랑스와 독일의 여론조사를 보면 “무슬림들이 자국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의견이 프랑스 42%, 독일 40%에 달했다고 하며 “무슬림들이 사회에 잘 동화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프랑스 68% 독일 75%라고 한다.(파리AFP=연합뉴스 2011.01.05)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의 지도자 그룹들이 분별력과 혜안이 없으면 후손들이 불행해 진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천문학적 금액의 정부지원을 업고 급격히 퍼져가는 다문화 체제 확산분위기는 그 의도는 좋으나 이슬람의 정체를 미리 염두에 두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유럽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사하게도 모든 무슬림들이 철저히 꾸란을 교육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헌신된 몇몇 사람들만 비밀리에 진짜 이슬람 교육을 시킨다. 나머지 대부분의 평범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속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온건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신앙이 깊어지고 꾸란을 깊이 이해할수록 그것을 실천하는 과격한 무슬림으로 변해간다는 것이 문제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악하고 거짓된 영에 속고 있는 불쌍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며, 그들도 잘못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선한 이웃이 되어 모든 인류가 서로의 행복을 위해 도우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