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2019년에 출간한 『마가복음 읽기: 일상과 신앙』에서, 필자는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부분(막 14:66-72)의 소제목을 “베드로의 닭처럼 우리의 닭도 언제 울지 모른다”로 했었다.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의 교만이 한순간에 무너졌을 때 닭이 울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닭도 언제 울지 모르니 겸손하자 했었다. 이번에는 초점을 좀 틀어서 베드로의 닭이 인생의 중요한 경고음임을 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세 번의 과정은 진보한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와 함께 있었음을 ‘부인’(70절) 하지만,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하며(72절), 마지막 세 번째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한다(74절). 그러니까 그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부인->맹세와 부인->저주와 맹세와 부인으로 하나씩 추가되며 발전한다. 죄도 진보한다.

그때 닭이 울고 베드로는 통곡한다(마 26:74).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더욱 더 강하게 그렇게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깨닫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닭이었다. 닭을 사용해서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설이니, ‘닭대가리’라는 닭에 대한 비하 언어도 고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닭 울음소리에 자신이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서 베드로는 통곡한다.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잘못된 길로 갈 때,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 베드로에게 그것은 닭이었다. 우리도 잘못된 선택지를 선택하고 그 길로 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도 닭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가는 길이 바른길이 아니구나, 내가 선택한 것이 틀린 것이구나, 내가 하는 말이 바른말이 아니구나, 내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구나, 내가 바라보는 비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야망을 성취하려는 비전이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자신의 닭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없으니 수시로 죄를 짓지 않는가. 가룟 유다에게도 그 닭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경고음이 없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스스로 알고 뉘우쳤지만(마 27:3), 그다음 선택지인 회개 없는 죽음이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닭울음이 없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점은 경고음이 밖에 있느냐, 자신에게 있느냐의 차이였다. 베드로는 스스로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닭의 도움을 받고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스스로 깨우쳤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 베드로보다 낫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이 자신에게 갇혀 버렸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특별 은총과 자연 은총의 차이 같다. 베드로는 밖에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를 통해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달은 반면, 가룟 유다에게는 그런 특별 은총 없이 그저 뉘우침이라는 자연 은총만 있었다. 그러니 닭은 단순히 닭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선물일 수 있다. 가룟 유다에게는 없지만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은 특별 은총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베드로의 닭이라는 특별 은총의 복음이 들리기를 소망한다. 그래야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에 죄를 짓고, 죄를 짓기에 죄인이다. 하지만 회개의 길이 있다. 주님께로 돌아가면 된다. 주의 얼굴을 구하면 된다. 베드로는 특별 은총으로 주의 얼굴을 구했지만, 가룟 유다는 주의 얼굴을 찾지 않았다. 특별 은총이 없어서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이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고 고백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자 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얻고자 함이다. 왜냐하면 외적 신뢰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얼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두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지 말 것을’(9절) 간구한다.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떠난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서는 버린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에(9절), 다윗이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한다.

볼 수 없는 하나님임을 다윗인들 왜 몰랐을까? 그럼에도 다윗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것은 그만큼 다윗이 처한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며 간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자.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기에 이 한 문장은 모순 어법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얼굴, 그것은 모순이 품고 있는 가장 행복한 희망의 근원이다.

살아가다가 불현듯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면, 우리가 선택할 것은 가룟 유다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베드로의 눈물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