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Photo : )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이장렬 교수는 서울대학교(B.M.), 서든침례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영국 에딘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수학했으며, 2010년부터 캔자스시티에 소재한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로 목회자와 신학자를 양성하는 사역에 힘쓰고 있다. 복음서와 신약기독론 등 성서학 분야의 학문적 연구와 저술을 이어가는 한편,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한 말씀 묵상 안내서를 저술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2023년 4월 3일 월요일] 성전 뜰에서의 엄중한 경고

읽을 본문: 마태복음 21:12–17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주: 여기서 ‘성전’은 헬라어로 ‘히에론’으로, 성전 건물이 위치한 구역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성전 내부(특히 지성소)를 지칭하는 헬라어 단어 ‘나오스’와 구분됨*]
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21: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21: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말씀 해설과 묵상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겸손’과 ‘온유’는 불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이방인의 뜰)에서 시행되었던 희생제물 매매 및 환전 업무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합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희생제물 매매 및 환전 업무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순례자들이 먼 곳에서 여행 왔기에 희생제물을 사고 파는 행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순례자들이 외지 화폐를 갖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성전세 납부 및 희생제물 구매를 위한 환전 업무 역시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그런 행위가 이방인들이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즉, ‘이방인의 뜰’)에서 이뤄졌다는 데 있습니다. 성전 뜰에서 벌어진 제물 매매 및 환전 행위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방해, 차단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바로 그 점에 대해 강력히 문제 제기를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56:7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21:13)이라 선포하십니다. 성전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임을 그렇게 상기시킵니다. 이는 성전제도가 의미하는 바, 즉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이 가능함을 시사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이 시위를 통해 영적으로 타락한 성전제도와 성전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강력 경고합니다(마24장 참조). 주님은 이사야 56:7 말씀에 이어 예레미야 7:11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마21:13)로 칭하고, 당시 성전지도자들의 특권 의식과 타락상을 질타하십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주 무대로 활동하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섬긴다고 자부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도리어 그 성전을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중간부에서 예수님이 시각장애인들과 다리를 저는 장애인들을 치유하는 사건이 보도됩니다(마21:14[레21:17-18 비교]). 성전 뜰에서 베푸신 이 놀라운 치유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1세기 유대교에서 종교-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되어 있던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거기 있던 어린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향해 소리 질러 외칩니다(마21:15 [9절 비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한 보잘것없는 촌구석(갈릴리) 출신 선지자’를 향한 어린이들의 열정적 반응에 격분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시편8:2 말씀을 인용하며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대응하십니다. 주님은 성경에 ‘도통’했다고 자부했을 이 종교지도자들을 그렇게 책망하십니다(마21:16).

우리 구주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1세기 유대교 내의 장애인들처럼 극도로 소외되고 모든 희망이 유실된 것 같은 이들을 끌어안아 품으시는 분이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 죽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기준이 모호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게 좋다’ 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준은 선명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명합니다(계2-3장 참조)! 성전 뜰에서의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와 그의 선명한 기준을 생각할 때 그가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 경외심을 말하는 것이라면,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기본적인 존중의 마음마저 상실되어 가는 현 시대 가운데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두려운’ 예수님이 바로 겸손하고 온유한 메시아이십니다. 그렇게 ‘매섭게’ 질타하는 예수님이 바로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몸 찢어 우리 대신 죽으신, 사랑의 구주이십니다(마20:28). 우리는 두 분의 다른 예수님들을 믿고 따르는 게 아니라, 한 분 주 예수님을 섬깁니다. 예수님의 겁나는 질타와 그의 십자가 사랑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통합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 감성, 의도에 잘 맞는 예수님의 모습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그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 그분 그대로에 여러분의 삶을 의탁하십시오. 여러분 모습 그대로 주님 품에 안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하나된 바로 그곳,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겸손히 머무십시오.

한 줄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 분 그대로를 믿고 따르게 도와 주소서.

** [묵상 심화를 위한 팁]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거듭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용된 구약 본문들을 그 해당 문맥(이사야 56장; 예레미야 7:1-15; 시편8편)상에서 읽으면 마태복음 21:12-17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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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난주간 묵상 가이드는 이충재 박사와 공저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요단출판사, 2021)에서 필자가 저술한 내용 중 pp. 286-351 부분을 발췌하여 개정했다. 출판사 및 공저자의 허락 하에 이 책의 내용 일부를 재사용한다는 점을 밝힌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4032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