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Photo : 기독일보) 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영성 계발에 장애가 되는 것 중의 다른 하나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냉소적인 태도이다. 실제로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기를 자주 하다 보면 스스로 교만해지고 불행해진다.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욕을 많이 하고 저주를 자주 하는 사람은 그 욕과 저주가 어느 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시 109:7). 주님은 남을 비판하는 것에 주의하도록 말씀하셨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1).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로서 일반인이 잘못하는 것을 항상 잘 지적해 냈다. 그들은 스스로 어리석은 자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안내자로 자처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날카롭게 도전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기들은 성전에서 도적질을 했다는 것이다. 남의 눈에 티끌은 잘 찾아내지만 자기 눈의 커다란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

물론 건설적이며 좋은 의미의 비판도 필요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무조건 수용하고 용납하는 것은 결코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은 대체로 상대방의 약점을 잘 들춰내서 종종 그것을 확대 해석할 우려가 있고 또 주관적인 판단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될 수도 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은 비판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성취는 깎아 내리고 자신의 작은 성취에 도취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기 중심적이어서 모든 것을 자기식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서 내 자녀가 작은 상장을 받으면 그것을 굉장한 것처럼 말하지만 남의 아이가 그런 상장을 받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남이 목소리가 크면 시끄럽다고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큰 것은 용기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남이 주장이 강하면 고집스럽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줏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요즘에 유행하는 "내로남불"이 되는 것이다. 즉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 대하여 냉소적이기보다는 격려하고 지원하기를 더 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사랑으로 권고해야 한다. 근래에 한국 교회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칼 질"을 많이 하는 교계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의 약점과 목사의 허물을 많이 드러내서 심지어 "한국 교회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일종의 악담까지 서슴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교회의 주일 예배가 폐쇄를 당하고 모임이 극도로 제한을 받지만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때문에 코로나 감염병이 더 확산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지극히 편파적이지 않을 수 없다. 수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서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는 카페와 엄청난 인파가 이용하는 전철과 버스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또 타종교의 모임에는 거의 제한이 없도록 허용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정도 모이는 교회 예배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도 공정하지 못하다. 아름다운 영성이 계발되려면 비난보다는 보다 긍정적인 접근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탐욕

욕심은 언제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한국에는 하나의 신화가 있다고 한다. "부동산 불패 신화"이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경쟁적으로 부동산을 쟁취하려고 경쟁하여 이제는 평생에 내 집을 사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푸념이 젊은 층에 만연하고 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빈곤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진다. 널뛰는 부동산을 잡겠다고 큰소리치는 정치인들 중에는 타인의 명의로 많은 부동산을 숨겨놓은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소설가 톨스토이의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설을 기억한다. 주인공 농부 바흠은 평생 땅을 일궜지만 자기 땅이 없는 것을 늘 한탄했다. 그 말을 들은 마귀가 그에게 속삭였다. "좋다. 내가 너에게 땅을 많이 주겠다. 그 대신 너를 내 손아귀에 넣으리라." 마침 이웃 마을에 작은 땅을 판다는 말을 듣고 망아지를 팔고 돈을 빌려서 그 땅을 샀다. 그런데 건너 마을에 좀 더 큰 땅을 좋은 가격에 판다는 말이 들렸다. 그는 집과 가축을 모두 팔아서 그 땅을 사들였다. 얼마 후에 더 좋은(?) 소식이 들렸다. 어느 부족장이 아주 넓은 땅을 헐값에 준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족장을 만나러 갔다. "아주 싼 값에 땅을 주겠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해가 떠서 떠나서 해가 질 때까지 출발지점에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만약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것이다." 농부는 간밤에 잠을 설치고 출발을 준비했다. 그는 힘차게 출발하여 곳곳에 표시를 달았다.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농부는 죽을 힘을 다해서 해가 막 지기 전에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족장은 웃으며 "당신은 많은 땅을 차지했소." 그 순간 농부는 너무 지쳐서 쓰러져 목숨이 끊어졌다. 농부의 하인이 그를 위해 무덤을 팠는데 그의 몸 하나가 들어갈 만한 손바닥만한 크기의 땅이었다. 욕심이 죽음을 부른 것이다.

비전과 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려는 것은 기만적인 일이다. 요즘엔 교회 표어마다 다양한 꿈과 비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느 때까지 몇 천 또는 몇 만 명의 교인 늘이기, 수 백 명의 선교사 파송 등 약간 허황된(?) 꿈을 말하는데 그것은 종종 목회자의 숨겨진 야심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생긴 것이 이른 바 "총동원 주일"이다. 온 교회가 많은 예산을 들여서 선물을 준비하고 행사를 치르는데 심지어 남의 교회 교인들까지 끌어와서 교회에 등록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등록된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꿈을 갖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남을 해치는 꿈이 될 수도 있다. "꿈은 커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말은 좋은 것이지만 허망한 욕심은 영성을 부패시킨다. 특히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은 결국 자신을 구덩이에 빠지게 한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것도 신앙이다 (히 13:5). 욕심보다 주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이 영성 계발에 유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