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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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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 목사의 성서로 문화 읽기 (3)

미주장신대 총장 이상명 목사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역사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길을 틔우고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길을 만드는 사람이 극복해야 하는 것은 뜨거운 사막이나 험준한 산악이나 혹한의 만년설이나 울창한 숲과 같은 외부적 대상만이 아니다. 더 큰 적은 그 여정 속에서 스멀스멀 찾아오는 깊은 고독감과 미답의 세계에 대해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자기 자신일 것이다.
인류는 수많은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충돌하고 융화하고 흥하고 망하면서 역사를 이어 나갔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나간 해방길, 동서 문명을 융합시킨 알렉산더 대제의 동방원정의 길, 로마 제국의 동맥이 되어 번영을 가져다준 로마 가도街道, 바이킹의 침략의 길, 두 문명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비극적 충돌을 야기한 십자군 원정길, 세 갈래 길, 즉 초원길, 비단길과 바닷길로 개척된 동서 교류의 발전을 짊어지고 문물을 오가게 한 실크로드 등. 이렇듯 인류는 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전쟁의 역사도, 나라와 민족을 구했던 영웅의 역사도, 새로운 문명을 열었던 역사도 길에서 이루어졌다. 로마 가도처럼 이민족을 침공하기 위해 건설되었던 길이 제국의 국력이 쇠진하면서 게르만족과 흉노족과 같은 북방 민족들이 로마를 도리어 침탈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새로운 길의 열림과 함께 문명도 시작되었지만 광기와 폭압과 무자비한 정벌이 가져온 끔찍한 야만의 역사도 그 길 위에 아로새겨졌다.
본래 길은 없었다
본래 광야에도 산에도 바다에도 길은 없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길은 만들어져야 하고 그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길 위에서 고투하다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죽은 자의 백골이 묻힌 그 길에서 또다시 새로운 길을 이어 나가야 한다. 그 끈질긴 길의 이어짐과 교착이 역사를 만들었다. 그래서 길은 삶이며, 그 길을 만드는 사람은 역사를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길을 닦고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성을 쌓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성을 쌓고 안주하는 사람은 부단히 길을 내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자신의 책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21세기는 ‘유목민적 가치관’을 가진 새로운 인간들이 대거 출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목민이란 한 가지 가치관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와 도전과 모험을 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성을 짓고서 그 안에 안주할 때 도전 정신은 사그라지고 온갖 물욕적이고 안일한 것에 도취되어 부박(浮薄)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광야를 기억하라
본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곳의 농경문화와 농경신(바알와 아세라)을 자연스레 수용하고 말았다.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 길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 임재를 알리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일용할 양식을 주셨던 야훼 하나님의 강렬한 이야기도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 저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을 쌓은 솔로몬 시대가 가장 부요했지만 도처에서 타락과 몰락의 징후를 가장 많이 간직했던 때이기도 했다. 길에서 멈추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광야의 밤기운처럼 쉬 식고 말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나에게 성실하였는지, 네가 신부 시절에 얼마나 나를 사랑하였는지, 저 광야에서, 씨를 뿌리지 못하는 저 땅에서, 네가 어떻게 나를 따랐는지, 내가 잘 기억하고 있다(렘 2:2, 새번역).
예레미야는 광야 시절 이스라엘이 청순한 새색시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따랐다고 평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그 무엇도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서로를 향한 밀착된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즉 광야 시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첫사랑을 나누던 허니문 시기였다. 그러나 광야는 허니문을 나누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메마른 땅이었다.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고 올라오신 분,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분, 그 황량하고 구덩이가 많은 땅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그 메마른 땅에서, 어느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고 어느 누구도 살지 않는 그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는구나(렘 2:6, 새번역).
앳된 신부의 순애보를 써라
거친 광야 길이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보호를 절절이 체험했던 장소였고, 그분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동을 멈추고 땅을 차지한 후에는 그 땅의 신들을 섬기고 그 문화에 동화되고 예속되어서 길을 잃고 말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방 민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본래 목적도 잊어버렸다(참고. 사 49:6). 길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를 잊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믿음으로 전인미답의 땅을 개척한 빌립처럼, 일상의 안일과 보장된 안전을 박차고 나가는 개척자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베드로전서는 우리를 낯선 땅에 거하는 나그네로 부른다.
사랑하는 형제들, 낯선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체적인 욕정을 멀리하십시오(벧전 2:11, 공동번역).
나그네는 정체성을 잊고 이 땅에서 기생하는 온갖 욕정에 물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영혼에 덕지덕지 붙은 삿된 욕정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비상할 수 없다. 성숙도 영성의 자람도 멈추고 만다. 순례자의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과의 달콤하고 감미로운 허니문이 평생 지속되려면 세상의 헛된 욕망의 성(城)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거칠고 메마른 광야 길에서 앳된 신부의 순애보를 써내려 가는 길을 택해야 하리라. 그 길이 나와 너를 생명으로 이어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