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윌슨과 동시대에 함께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위 사람은 제가 총장으로 있는 프리스턴대 박사과정 학생으로, 자신의 모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하고 동양의 전반적인 정세에도 정통할 뿐 아니라, 우수한 능력과 고결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어서 기꺼이 귀 교회에 추천합니다."

후일 28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 12. 28-1924. 2. 3) 총장이 제자인 이승만을 위해 써 준 친필 추천장(1908. 12. 15.) 중 일부 내용이다.

추천장의 주인공인 이승만은 윌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1913-1921) 중이던 동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1919-1923)이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인간적 우연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대통령(President)'이라는 칭호를 지구상에서 맨 먼저 고안해 낸 사람들은, 모국이었던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전개해 승리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었다.

대영 독립전쟁의 발화점이 된 '버지니아 항쟁'의 최초 이슈는 "영국 의회에 대표(의원)를 내보낸 바도 없는데 왜 영국군을 보내 우리로부터 세금을 내라고 강압하느냐!"는 재산권 수호였다.

독립전쟁 승리로 천부인권 보장을 담은 세계 최초의 헌법으로 평가되는 <버지니아 권리장전(1776. 6. 12)> 및 <독립선언서(1776. 7. 4)> 정신을 계승한 연방헌법(1787. 9. 17)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행복은 국가라 할지라도 침해할 수 없다"는 내용과 더불어, '대의제' 및 '권력분립의 원리(법치주의 원리)'로 확대되었다.

미국 헌법의 걸작품 '대통령제'를 도입한 임시정부와 이승만

기존 헌법 내용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형태로 헌법을 수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미국헌법 최고 걸작품은 단연 '대통령제'이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principle of checks and balances)' 하에 대통령을 선출한 뒤, 임기만 있을 뿐 왕과 같은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 국가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권한을 남용하거나 헌법을 위반하는 경우 의회로 하여 파면(탄핵)을 할 수 있게 해, 주권자인 국민에게 철저히 복종하도록 했다. 신생 미국은 탄생한 지 243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시스템으로 세계 최강국 지위를 더욱 강화해 가고 있는 중이다.

세기적인 이 신생 제도(대통령제)가 1919년 '3·1 민족저항운동' 뒤에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에서 등장한다.

군주제와 일체의 특수계급을 부인하는 '민주공화제' 및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대의제',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시한 기본권 보장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 4. 11)'은 "인류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국제연맹(UN 전신)'에 가입한다(제7조)"라고 명기하고 있다.

이승만
▲이승만과 김구. ⓒ피스코리아 제공

'인간 이승만' 아닌 '이승만의 하나님' 드러나야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 법통(법적 정통성)의 출발점으로 규범화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 헌법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부정할 수 없는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인 이승만 박사(1875. 3. 26-1965. 7. 19)다.

망국적인 흑백논리와 보혁대립으로 인해 그 평가가 여전히 극단을 치닫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통탄하면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라(잠 4:27)'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 '통합적 관점에서 본 이승만론(李承晩論)'을 개진해 보고자 한다.

'통합적 관점에서 본 이승만론'의 전개를 위해서는 '진리(성령)안의 성찰'이 필요하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하였으니, 진리 안의 성찰을 해야 진실하고 객관적인 성찰이 가능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이승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야곱·다윗 등 구약성서상의 위인들 및 베드로 사도와 사도 바울로 대표되는 신약성서 상의 믿음의 선진들도 다 치명적 단점을 안고 있다.

성경은 그들의 적나라한 단점을 여과 없이 공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와 함께 그들의 삶은 존중을 받고 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성경이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총체적으로 함축하고 이승만 박사의 삶을 가장 존귀하게 만드는 길을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19)"는 성구가 제시하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마 그의 삶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이 조명되어야 그도 빛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만이 자신이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람(사 43:1)"이라고 지명한 '하나님의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조명할 수 있다.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의 호)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였던 로버트 올리버가 쓴 <이승만 전기>와 우남의 기고문 <옥중전도(1905. 5, 신학월보)> 등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지식'으로 하나님을 만난 바 있는 우남(1895-1897, 배재학당 재학)은 생사의 기로에 서야 했던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성령'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개화파 거두 박영효 등과 고종을 폐위하고 공화정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후 한성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시도한 탈옥 실패로 종신형이 확정(1899. 7. 27)될 때까지, 무려 7개월여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무려 10㎏이 넘는 칼을 쓰고 거의 매일 같이 살가죽이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탈옥 공범인 최정식이 사형에 처해진 뒤라, 자신도 곧 사형장으로 끌려 갈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 우남은 "저희 조국과 제 영혼을 구해 주옵소서, 하나님!"이라고 외치며, 사선(死線)에서 나오는 절규에 찬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다 쓰러진 후 깨어나면, 형용할 수 없는 평온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경험하곤 했다.

살인적 고문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체험으로 만난 구원의 하나님

'평화이신 성령님'이 임재하셨을 때만 가능한 초월적 은혜다. 우남이 성령님과 동행(임마누엘)하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는 '우남의 인맥'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한국교회사의 서장을 연 선교사들인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이 종신수인 우남의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고종의 특별 대사령(특별사면)으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 뒤, 구한말 순국지사가 되는 민영환의 주선으로 미국을 방문하며 시작된 조지워싱턴대(학사)-하버드대(석사) 유학 기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박사 학위를 받게 되는 프린스턴대 윌슨 총장과의 만남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각별한 은혜였다.

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받은 수여식(1910)을 끝으로 대학을 떠나 정계에 투신해 28대 미국 대통령(1913-1921)이 되는 윌슨은, 총장 시절 우남을 종종 집으로 초대했을 뿐 아니라, 미국인 교회에서 우남이 신앙 간증을 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준 바 있음은 서두에서 밝혔다.

이승만
▲맥아더 장군의 '절친'이었던 이승만. ⓒ피스코리아 제공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후일 UN군 최고사령관)이 되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의 인연은 윌슨과의 인연과 더불어 '신비'에 가깝다.

맥아더는 자신보다 5살 위인 우남을 영관장교 시절부터 '절친'으로 지내며 친형처럼 대했다. 해방 후 귀국에 어려움을 격고 있던 우남을 위해 '맥아더 전용기'를 제공(1945. 10. 16)한 사실과, 두 사람간의 격식 없는 만남들이 이를 실증한다.

우남의 국내 인맥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맺어진 경우가 많아 논외로 쳐야 할 것이나 딱 한 사람, 백범(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 아호)과의 인연은 윌슨이나 맥아더에 못지 않은 '은혜'였다.

망국적 민족분열책을 존립 기반으로 삼아 온 일부 언론인 및 정치인들이 '우남-백범'을 갈라놓고 있는 것은, 두 사람간의 일대기를 모르고 하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허위날조다.

우남(雩南)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움직이신 세기적(世紀的) 인물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우남은 이동휘 국무총리 등의 주도 하에 임시의정원에서 탄핵 파면된 바 있다(1925. 3. 23).

이후 우남의 삶은 무료할 만큼 단순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런 우남이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이 김구 주석이었다.

1919년 2월25일, 우남은 프린스턴대학원 시절 은사였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완전독립을 전제로 윌슨 대통령 주도로 탄생 예정(1920. 1)인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며칠 뒤 '3·1운동'으로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면서, 수면 아래 있던 '위임통치 청원'건을 이동휘 등이 정치적 목적으로 들고 나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 파면했다.

헌법 개정(임시약헌, 1927.3.5-)으로 주석에 취임한 백범은 평소 '형'으로 불러 온(백범이 한 살 아래) 우남을 국제연맹 파견 전권대사로 임명(1932. 11. 10)한다.

지금으로 치면 UN주재 대사가 된 우남은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 남다른 달란트인 외교력을 발휘한다.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지는 못했으나, 일제의 한반도와 만주침략의 부당성을 논박한 우남의 인터뷰 기사가 세계 각국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여생의 반려자가 된 프란체스카 여사도 이 때 만났으니, 백범이 맺어준 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생의 반려자 프란체스카 여사도 김구 주석이 맺어준 셈

1941년 6월 4일, 김구 주석은 우남을 주미 외교위원장(주미 임시정부대사)으로 임명한 뒤, 임명장을 미 국무부로 보낸다.

정치학 박사인 우남은 이 직책을 해방 전후 기간 십분 활용한다. 1945년 12월 3일, 경교장(백범의 집무실)에서 열린 환국 후 최초 '국무회의'에도 이 직책으로 동석하였다.

"대한민국의 주석 김구 씨는 우리 독립을 위해 영웅적 투쟁을 해왔습니다. 모두 믿고 지도자로 추대하여도 넉넉한 우리의 참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환국 다음날, 우남은 자신에게 국내외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준 백범에 대한 고마움을 기자들 앞에서 피력한 바 있다.

양인 간에 합일점을 찾을 수 없었던 남한 단독선거(1945. 5. 10) 기간을 전후하여 '반이승만 전선'의 선두에 서달라는 각 정파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백범은 응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중형을 선고 받았다가 살아난 '하나님의 사람들'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승만
▲이승만과 김구. ⓒ피스코리아 제공

지금까지 필자는 우남을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성령 하나님(영권)께서 우남에게 붙여주신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의 은혜로운 인연(인권)을 논증하여 보았다.

지금부터는 세계적 선교대국이 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초석 역할(물권)을 한 우남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조명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남을 대한민국 '대의제 선구자'로 쓰셨다. 배재학당에 부임해 온 스승 서재필로부터 미국 대의제와 정치제도를 배운 우남은 1898년 11월 10일부터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농성을 주도한다,

그해 11월 26일 고종은 수천 명의 시위대와 타협을 위해 '민의(民意)' 대변기구로 '중추원'을 구성하는데, 의관(議官,상원의원 격) 50인 중 24세의 우남이 포함된다.

후일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우남은 자신이 한성감옥에서 전도한 이상재 선생의 추천으로 YMCA 간사를 거쳐 학감으로 있으면서, YMCA는 물론 전국순회 강연을 통해 '대의제'와 '국민주권' 및 '대통령제'를 알린다. '대의제'에 관한한 우남 이상의 전문가는 한반도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남(雩南)을 '대한민국 대의제'의 선구자로 썼다

둘째, 우남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는 주인공이 된다. 미국 대의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제'에 대한 최고 전문가가 우남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터라, '3.1 민족저항운동' 직후 각 지역의 임시정부마다 최고책임자(집정관 총재, 국무령, 대통령)로 우남을 추대하거나 선출하였다.

정작 우남 본인은 각 지역(한성,노령,상해) 임시정부 수립 현장에 없는 가운데, '부재중 선출'이었다. 실제 감투 싸움이 있었던 터인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남은 각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직함의 영문 표기를 'President'로 했다. 논란의 와중에 통합 임시정부격인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9월 6일 우남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임시)대통령'에 선출한다.

셋째,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문표기인 'Republic of Korea'를 100년 전(1919년) 세계 각국을 상대로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도 우남이다.

현행 헌법이 전문(前文)에서 지금의 대한민국 법통으로 확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의 핵심 골격들이 우남과 직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1공화국 헌법에 의거 대통령에 선출된 1948년이 아니라, 100년 전 이미 이승만 박사는 명실상부한 '건국대통령'이라 함이 맞다. 고전적 이론인 '영토⋅주권⋅국민'을 내용으로 한 '국가구성 3요소'설에 의거해도 결과는 동일하다.

우남(雩南)을 '1948년 건국대통령'으로 묶는 것은 헌법과 성경에 반한다

주권론의 대가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역설하듯, 주권이란 '일반의지(지배적 다수의 국민의사)'인 만큼 '항일독립의지'를 가진 일제하 동포들의 뜻이 곧 '주권'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수천 년을 내려 온 우리 '영토'이며, 일제의 폭압 속에 신음하면서도 '그곳'에서 살아 온 우리 동포들이 '국민'이기 때문이다.

우남을 '1948년 건국대통령'으로 묶는 논리는 1948년 이전의 국가와 국민의 헌법적 공익의 포기로, 헌법원리에 반한다. 한 마디로 위헌적 논리다.

뿐만 아니라 우남을 대한민국 '건국 100년'의 '초대 대통령'으로 세우고자 '영권(성령 체험)'과 '인권(인맥 조성)' 및 '물권(직책 부여)'을 부여하신 하나님 '은혜'를 저버리는 행태이다.

헌법논리로는 물론 성경적 원리로도 100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하나님 은혜로 1948년에 제1공화국 대통령으로 쓰임받았으나, '4.19 의거'를 맞아 '하야(下野, 1960. 4. 27)'하였다.

1공화국 집권 12년 기간에 대한 쏟아지는 비난과 성토 속에, 조국과 민족에 대한 우남의 필생의 사랑은 함몰되고 없었다.

하와이로 떠나기 전에는 배재학당 시절부터 다니던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하와이에 도착해서는 뇌출혈로 쓰러져 요양원으로 가기 전까지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봉헌하였다.

홍원식, 영웅 백범
▲<영웅 백범>의 저자, 홍원식 박사. ⓒ이동윤 기자

우남(雩南)이 후세에 남긴 '하와이 유언(1961.12.13)'

우남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 3:8)'를 맺고 영면(1965. 7. 19)하였는지 여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누구의 삶에든 공과(功過)가 병존하는 터에, 공로보다는 과오에 집착하면 개인이든 국가이든 그 장래는 어둡다.

더욱이 신앙인이라면 다언의 여지가 없다. 구약의 대표적 인물인 아브라함과 야곱에서부터 신약의 대표적 인물인 베드로와 바울에 이르기까지 중다한 인간적 과오가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축복이신 하나님을 보듯, 우남(雩南)을 통해서도 자비하신 하나님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대혁명으로 수천만 명을 희생시킨 마오쩌둥(毛澤東)의 사진을 여전히 자국 화폐에 담고 있는 중국이 'G2' 강국으로 발돋음한 저력 또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았으면 한다.

불구하고 우남(雩南)이 양자인 이인수 박사(88, 전 명지대 교수)에게 남긴 '하와이 유언(1961. 12. 13)'은 후세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와 닿는다.

"너는 남이 잘 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믿지 마라! (그런 소리 믿다) 이렇게 절단이 난 걸...."

하나님께 붙들려 살면 우리 민족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과 사람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아름다운 귀천(歸天)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통해, 참으로 주목해야 할 분은 100년 전 이승만 박사를 이 땅의 '건국 대통령'으로 쓰시고자 세우셨던 하나님이어야 할 것이다.

홍원식
통일헌법학 박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