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stats
에디션 선택 통합홈 English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DC 애틀랜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한국기독일보
X
뉴스 기독교 경제 Tech 라이프 오피니언 크리스천 잡스 포토 비디오

“하나뿐인 목숨 너무 아꼈기에… 주님께 바친 주기철 목사”

기독일보 이대웅 기자

입력 Apr 18, 2019 06:41 AM PDT

Print 글자 크기 + -

Share on Facebook Share on Twitter

김명혁-이응삼 목사, ‘주기철 목사의 영성’ 대담

어린 주광조를 안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 ⓒ홍성사 제공

어린 주광조를 안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 ⓒ홍성사 제공 (포토 : )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와 말씀과 섬김과 순교의 영성을 염원하며'라는 주제로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와 이응삼 목사(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전 사무총장)가 18일 오전 서울 강변교회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김명혁 목사는 매달 한 차례씩 교계 주요 원로들과 신앙의 선배들을 주제로 대담을 열고 있다. 대담은 두 사람의 발표와 이후 토론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Like Us on Facebook

맏형 목회 활동하던 교회에서 '소년 목사' 칭호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 등 가는 곳마다 부흥
신사참배 선봉 서서 거부하다 4차례 검속당해

김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침략해올 것을 우려한 일가의 어른 주기효 씨는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고, 소년 주기철은 이 학교에서 투철한 민족정신과 민족애를 키웠다.

그 즈음 맏형 주기원은 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고, 소년 기철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소년 목사' 칭호를 듣기도 했다. 개통학교 7년을 마칠 무렵, 그는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오산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19년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김익두 목사의 마산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성신을 받으라"는 외침에 큰 감동을 받고, 1921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했다. 평양 신학교 19회 졸업생으로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26-1931년 초량교회에서 사역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 기간 진주 성경학교와 경남 성경학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1931년 7월 마산 문창교회로 옮겨 6년간 목회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사경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 평양 산정현교회는 길선주 목사를 이을 지도자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했고, 1936년 7월 하순 부임해 1937년 교회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주기철 목사는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한국교회를 지키고자 했다. 그는 이를 선봉에 서서 반대하다 1938년 2월 8일 경찰에 1차 검속돼 27일만에 석방됐고, 1938년 8월 제27회 장로회 총회를 전후하여 2차 검속돼 6개월간 대구 경찰서에 수감됐다 1939년 2월 석방됐다.

또 1939년 8월 3차 검속됐다 9개월 후인 1940년 4월 20일 석방됐고, 1940년 9월 다시 4차 검속돼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다,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로 주님 품에 안겼다.

일제의 가혹한 핍박과 고문 수행되던 현장에서
사시고 버티고 당하시다 끝내 순교하신 신앙인
한국교회 놀라운 저력, 선조들 순교자적 신앙에

이응삼 김명혁
▲이응삼 목사는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된 교회였다"며 "우리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이 특별한 섭리는 토마스 목사의 1866년 대동강변에서의 순교로 시작됐다"고 전했다. ⓒ이대웅 기자

이응삼 목사는 "주 목사님은 75년 전 복음을 위해 '사슬에 메인 사신'이 되셨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았고, '결박과 환란' 앞에서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일사각오의 신앙인이자 순교자"라며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지 7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가 주 목사님을 추모하는 것은,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주 목사님이 사신 시대는 말 그대로 고난의 길, 광야의 길이었다. 한국교회의 치욕과 변절의 시대였다. 일제의 가혹한 핍박과 고문이 한국교회를 향해 체계적으로 수행되던 바로 그 현장에서, 주 목사님은 사시고 버티고 당하시다 순교로 생을 끝낸 신앙인이셨다"며 "주 목사님은 1931년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거부를 결의한 때부터 1944년까지 13년간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4차례 구속을 당하셨고, 구속 기간 동안 외로움 속에서 가혹한 심문과 갖가지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받으셨다"고 전했다.

그는 "주 목사님의 육신은 비록 차가운 주검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으나, 이 생명의 신앙은 주 목사님의 순교로 안개와 같이 희미하고 사라지기보다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철저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떠났으나,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계신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된 교회이다. 주 목사님으로 상징되는 일제시대 신사참배 반대는 일제에 대한 민족 양심의 고귀한 마지막 저항이자,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대한 몸 바친 충성이었다"며 "그리고 우리 교회사에서 세 번째 커다란 시련기에 순교자가 여럿 나온 것은 공산주의의 박해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응삼 목사는 "이렇듯 우리 교회사는 전통적 가치 때문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유물론적 혁명적 투쟁 때문에 수난과 순교의 역사를 겪었다. 이는 세계에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통절한 것이었다"며 "우리 교회가 지금 놀라운 발전을 한 저력은 다른 것이 아닌, 믿음의 선조들의 순교자적 신앙이었고, 그 중심에 주 목사님이 있다"고 역설했다.

또 "주 목사님은 영웅적인 사람이 아닌,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그리워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리라는 고집스러움,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자 한 이유 때문에 죽음의 행렬에 들어선 것"이라며 "결코 이름을 나타내려거나 보상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다만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고, 예수 사랑의 감격 때문에 고난의 길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주 목사님은 하나뿐인 목숨을 너무나 아꼈기에, 주님을 위해 바쳤다. 주 목사님이 떠나셨으나, 아직 여기 남은 이유는 이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를 따라가야 한다"며 "그것이 우리 신앙을 지켜내고 이 나라를 하나님 섭리 속에 계속 걸어가게 하는 것"이라며 주 목사의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죽음을 아끼다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이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도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는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김명혁 이응삼
▲김명혁 목사는 "예수님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양 무리들을 사랑하시며 희생적으로 섬기셨던 것처럼, 주기철 목사님도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목자의 성품으로 양 무리들을 사랑하며 희생적으로 섬기셨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1. 하나님 중심적 목회자

이어 김명혁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삶과 사역의 특징을 4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 중심적 목회자'다. 그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믿음의 길을 달려가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야말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하나님 중심적 목회자"라며 "주 목사님에게는 예수님의 삶과 비슷한 모습들이 많았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시고 헌신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듯, 주 목사님도 하나님께만 절대 복종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다"고 말했다.

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듯, 주 목사님도 옥중에서 갖은 고초를 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 전파하셨듯, 주 목사님도 하나님의 말씀만 타협 없이 전파했다"며 "예수님의 생애가 성령으로 일관되셨듯, 주기철 목사님의 생애도 성령으로 일관됐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하나님 중심적 설교자요 목회자"라고 소개했다.

2. 기도와 말씀의 사람

둘째로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었다. 그는 "주 목사님은 부산 초량교회에서 기도와 설교에 주력했고, 그의 설교는 기도의 동산에서 영근 설교였다"며 "구덕산에 올라 종종 철야기도를 하셨고, 금·토요일에는 월-목요일까지 준비한 메시지를 놓고 특별기도를 했으며,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도 가끔 산에 올라갔다. 문창교회 목회도 마찬가지였다"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주기철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새벽 기도를 권면하며 '새벽 시간은 은혜가 많은 시간입니다'라고 자주 말씀했다. 자신도 새벽 기도를 빼먹는 일이 없었다"며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후에도 흐트러진 신앙의 분위기를 기도와 성경으로 일신했고, 교인들이 영적으로 모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주 목사님은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해 죽기를 각오한 투쟁을 작정하고, 기도와 목회에 전력을 다했다. 하나님께 대한 결연한 충성과 헌신의 자세로, 강단에 나설 때마다 주 목사님은 무슨 광채라도 나는 것 같았다고 한다"며 "신사참배 강요가 더 심해지자 1938년 6월 김화식·이유택 목사와 묘향산에 들어가 10일간 기도했고, 5일간 금식했다. 다 넘어진 한국교회를 홀로 버티어 세우기 위해 죽음의 준비를 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다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주 목사님은 산에서 기도하던 중 무아지경에 들어가 불 솟듯, 때로는 마음 속에서 기도가 강물처럼 흘러나옴을 느꼈다. 너무 감격에 휩싸여 30분 이상 다른 말 없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만 되풀이할 때도 있었다"며 "2차 검속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돼 1939년 2월 첫 주일 아침 평양역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로 달려가서 성전에 엎드려 기도한 뒤 새로운 결심으로 예배를 인도했다"고 말했다.

그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마 5:11-12, 롬 8:18; 31-39)'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다. ①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②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③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④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⑤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김 목사는 "주기철 목사님의 목회는 일사각오의 기도와 설교를 삶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준 삶과 죽음의 목회였다"며 "그의 기도와 설교, 그리고 삶과 죽음으로 남은 자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응삼 김명혁
▲김명혁 목사와 이응삼 목사(왼쪽부터)가 대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3. 성령으로 기도하고 설교한 성령의 사람

셋째로, '성령으로 기도하고 설교한 성령의 사람'이었다. 김 목사는 "주기철 목사님은 기도와 설교에 주력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설교했다. 그는 성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바로 기도할 수 있다면서, 성신은 바로 기도의 신이라고 강조했다"며 "또 신자가 성령을 받아야 주님 말씀대로 행할 수도, 설교나 전도를 할 수도, 환난 날에 승리할 수도 있다고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또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고,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문을 받고 있을 때도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한다"며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의 일부를 소개했다.

"성신은 지금도 신자에게 충만하시고 교회 안에서 역사하신다. 성신을 받으면 각양 은혜를 받는 중에 특히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하고 전도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며 모든 환난에서 이기는 것이다. 주님 명하신 대로 행하려면 성신을 받아야 한다. 성신 받지 못한 사람은 예배당에까지 나올 수는 있으나 예수님의 교훈을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면 성신을 받아야 한다. ... 성신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말 충만하게 합소서."

4. 사랑으로 섬긴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

넷째로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긴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김 목사는 "주기철 목사님은 하나님께 대한 일사 각오의 충성과 헌신에서 사자같이 단호하고 강했으나, 성도들에게는 비둘기같이 순수하고 부드러웠다"며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소박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한없이 부드러웠고 순수한 사랑과 섬김을 보였다. 고등계 형사들까지도 그의 사랑과 섬기의 인격에 감동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일화를 소개했다. 주 목사가 부산 초량교회를 시무하던 어느 날, 경관 정복을 입은 순사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이에 주 목사는 그에게 복음을 가르치며 그를 위해 성심 성의껏 기도했고, 김석진이라는 그 순사는 결국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나중에는 목사가 됐다고 한다. 이 같은 개인 접촉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목사나 교육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김 목사는 "주 목사님은 사람에 대한 정도 많았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할 때 사모님이 병으로 죽었을 때, 방성통곡하며 슬퍼했다. 그리고 분쟁으로 상처입은 마산 문창교회를 기도와 말씀, 사랑의 섬김과 관후하고 온유한 인격으로 치료하고 부흥 발전시켰다"며 "문창교회 목회 당시 이웃 성결교회와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고, 심지어 문창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독립교회와도 친밀한 교제를 증진시키고 그 교회와 제직 연합 간친회를 개최했다"고 했다.

김명혁 목사는 "우리들은 기도와 말씀과 섬김과 순교의 영성을 몸에 지니고,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며 순교의 피를 흘리시고 그리고 성도들과 자기를 박해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한 없는 용서와 사랑과 섬김을 베풀다 주님 품으로 돌아가신 주기철 목사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하며, 무릎 꿇고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지극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 2016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의견 나누기

Real Time Analytics
Web Analy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