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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미국·일본 기독교, 3.1운동 어떻게 반응했을까?

기독일보

입력 Apr 17, 2019 08:15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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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원들.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목사.

임시정부 국무원들.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목사.

 

조선 개신교, 식민지 지배 상황 이스라엘에 비유
신의 '공의' 매개로 기독교와 민족주의 결부시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고난 속 심리적 균형 유지

2019년 봄학기 홍성강좌 두 번째 강의가 16일 오후 서울 합정동 양화진책방에서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부)를 강사로 개최됐다. 이날 강좌에서는 '3.1운동과 조선·미국·일본 개신교의 반응과 신학'이라는 주제로 조선 개신교인들의 3.1독립운동 참여 논리와, 이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개신교계에서 보인 반응과 논리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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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선 개신교'와 3.1운동에 대해 그는 "3.1독립운동은 조선이 1910년 일본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한 후 9년만에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 독립 운동이었다"며 "일제의 철저한 무단 통치 아래 모든 집회와 결사가 금지돼, 종교단체와 공사립 교육기관만이 유일한 합법적 단체였다. 따라서 국내에서의 운동의 계획은 천도교와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에 의해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양현혜 교수는 "조선 개신교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 조선의 역사적 상황을 이스라엘의 상황에 비유해, 고난 속에 감추어진 신의 약자의 자존을 보존하는 '공의'에 의한 세계 지배를 읽어냈다"며 "그들은 여기서 인간의 모든 역사 경영이 이러한 신(神)의 세계사 전개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궁극적 '복종의 원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양 교수는 "세계사에서 신의 '공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각 민족이 그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라고 인식했고, 이것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신앙적 근거였다"며 "즉 조선 기독교인들은 신의 '공의'를 매개로 인간의 전 생활을 통괄하는 원리로서 기독교와 민족주의를 결부시킨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조선 개신교인들이 펼친 '저항의 논리'의 특징으로는 △저항의 도덕적 정당성을 '신의 정의'에서 구했고 △패배의 결과에 대한 가치판단의 역전과 최종적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으며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에 의해 심리적 균형을 유지했는데, 그 심리적 보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읽어냈다.

미국 개신교, 한-일 양국 교회 조직 안전에 중점
조선 통치하던 일제 결탁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
3.1운동, 기독교와 관계없는 정치 운동으로 취급

한국 기독교인들의 3.1운동에 대한 대대적 참여는 잘 알려져 있기에, 특히 미국과 일본 기독교계의 반응이 관심을 모았다. 먼저 미국 개신교에 대해 그는 "조선과 일본에서의 포교적 성공과 양국 교회의 조직 안전이라는 선교적 이해에 중점을 뒀기에, 통치세력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기독교를 개인의 도덕 영역에 한정시키고, 정치는 별개의 논리에 맡긴다는 정교 이원론 입장에 섰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이러한 변명을 통해 그들은 조선 개신교인들에게 '현존의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면서, 조선 개신교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적 저항뿐만 아니라 약자의 자존을 보존하는 신의 '공의'에 근거한 신앙적 항거도 외면하고 말았다"며 "그러나 이를 위해 기독교를 좁은 의미의 개인의 사사로운 종교적 영역의 종교로 축소시키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3월 1일 조선 독립운동 봉기 소식이 뉴욕타임스 기사 등을 통해 일반 미국인들에게 알려지자, 시카고 감리교회 목사회와 장로교회 단체 등 각 기독교 단체는 조선 독립운동에 관한 성명문을 차례로 발표했다"며 "그러나 미국 개신교회는 3.1독립운동을 기독교와 관계없는 정치 운동으로 취급해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라는 근본 문제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탄압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 관헌의 잔학행위와 그 방지만을 문제시했다"고 했다.

스코필드박사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등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서울시 행운의 열쇠를 받은 모습.

일본 개신교, 의와 사랑 분리해 사랑만 강조
근대 천황제 지배체제에 용해돼 버린 개신교
민족적 이기주의 정당화 종교적 도구로 오용

일본 개신교에 대해선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기독교 특유의 신의 '의(義)'와 '사랑'을 분리해, 신(神)의 '의' 측면을 유대교적인 것으로 배척하고 '사랑' 일원주의에 섰다"며 "이 일원주의적 사랑을 매개로,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융합을 꾀했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다. 신의 독생자인 그리스도가 인간 대신 십자가에 달린 것은, 신 자신의 희생이기 때문에 신의 사랑임에 틀림없다"며 "그러나 이 경우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의(義)'의 분노가 신의 사랑의 대극에 있다. 신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의'의 주장을 관철하면서도,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약자로서의 인간의 자존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속죄양으로 내어주었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이룬 대속의 의미"라고 비판했다.

그는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의 의와 신의 사랑이라는 이원성에 의해 매개된 일원적인 사랑이다. 만일 신의 의가 의미를 잃어버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차별적인 사랑 일원주의가 되어 강자(强者)의 자기 정당화를 심판하는 사상적 계기를 상실하게 된다"며 "일본 개신교의 기독교 이해가 근대 천황제 지배체제에 용해돼, 민족적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도구로 오용되어 버린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재일본 미국선교단 지도자이자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한 대일본평화협회(평화협회)를 조직했던 G. 볼즈가 실태조사를 요구함에 따라, 1919년 5월 중순경 일본 개신회 각 교파 연합조직인 일본기독교협회동맹 소속 이시사카(石坂龜治), 가와카미(川上勇, 평화협회 임원)과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각 교파 기관지들은 이시사카의 시찰보고인 <조선소요지순회지>를 연재했고, 이시사카는 <조선사건을 논한다>, <조선소요와 선교사문제>, <우사미 장관에게 답한다>, <선교사가 본 조선의 소요>, <조선 독립문제와 선교사>, <조선문제에 관해서> 등을 썼다.

소다 가이치
▲일제강점기 황성YMCA(서울YMCA) 학관에서 일어 교사를 하며 이상재 선생 등 기독교 민족운동가들과 함께했던 소다 가이치 전도사(앞줄 왼쪽 세 번째). ⓒ영락보린원 제공

그의 논점을 요약하면, 먼저 사건의 원인은 한일병합 이후 10여년간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실책이고, 당면 개량책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화 정책을 폐지하고 무관정치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라고 했다. 양 교수는 "이시사카는 이 조치로 조선인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구 기독교인들의 일본 비난도 예방할 수 있다고 봤다"고 했다.

둘째로 3.1운동과 재(在)조선 선교사들의 무관하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일본 언론계와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3.1운동 발발이 재조선 선교사들의 배후조종과 일부 종교가의 불만 때문으로 보고 있어, 일본 국내에도 기독교에 대한 불신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었다"며 "이시사카는 선교사들이 3.1운동을 배후 선동했다는 주장은 선교사와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억측이고, 조선 통치에서 좋은 협력자인 선교사들이 조선 통치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한 것은 곧 그들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적대적 태도였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셋째로 조선 통치에 대한 선교사와 조선총독부의 협력 권고다. 양 교수는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인식한 이시사카는, 조선총독부가 선교사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버릴 것을 촉구했다"며 "구체적 방법으로 총독부가 선교사들을 이해할 것, 조선 통치에 선교사들을 이용할 것, 일본 국내 선교사를 조선에 정주시켜 일본에 관한 선교사들의 이해를 도와 오해를 방지할 것 등을 제안했다"고 이야기했다.

기독교와 조선 통치를 다리 놓으려는 일본 개신교인들의 '종교 보국의 열정'은 이어졌다. 개신교인 시라토리(白鳥健)는 '조선의 교우에게'라는 글에서 일본의 '국체'와 기독교를 양립시키고 로마서 13장을 동원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개신교인들을 비판했다. 와타세(渡瀬常吉)를 중심으로 한 조합교회(組合敎會)도 시라토리와 같은 논리로 '조선전도부'를 통해 당시 식민지 조선에 입국해 활동했다.

물론 이렇게 '어용화'한 와타세의 조선 전도에 일본조합교회 신자들이 모두 긍정적 반응을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안나카(安中)교회 가시와키(柏木義門) 목사는 복음전도와 내선일체의 두 가지 목적을 내건 와타세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 외에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전도의 목적은 결코 둘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육군, 조선전도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조선인 독립운동가 회유공작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 지도자였던 여운형을 동경에 초대하기도 했다.

양 교수는 "회유를 위해 일본 정부는 여운형을 정부, 군, 총독부 수뇌와 회담시키고, 일반인에게는 관람이 불허됐던 동경 아카사카 별궁(赤坂離宮)을 참관시킨 후, 당시 일본 최고급 호텔이었던 동경 한복판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며 "그러나 이 기자회견에서 여운형은 놀랍게도 일본정부의 의도와 정반대의 연설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여운형은 '조선 독립이야말로 일본과 협조해 동양 평화를 확실히 하는 길이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제일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이 기자회견과 아카사카 별궁 참관이 문제가 돼 일본 정부는 야당으로부터 정책 실패를 추궁당했고, 끝내 수상 하라(原敬)가 직접 '사죄'해야 했다"며 "상해에 무사히 돌아간 여운형은 개심하기는커녕, 더욱 정력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했다"고 전했다.

3.1운동
▲1919년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기독교 이해도 문제
기독교-민족주의 관계 규정에서 중요한 관건
'마성적' 자민족 절대화, 부단히 정화시켜야

결론에서 양현혜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서도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각 민족의 일원으로서 생활하면서도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기독교의 궁극적인 '복종의 원점'에 따를 수 있느냐는 것은, 약자의 자존을 보존하는 신의 '공의'에 근거해 자기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는 한편, 그 사회가 신의 '공의'에 걸맞은 내실을 가졌는가를 예리하게 주시하는 동시에, 민족주의에 내재하는 자민족 절대화의 마성적 요소를 부단히 정화시키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2019년 홍성강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 근대사의 카이로스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김마리아'라는 주제로 총 6주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부터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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