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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칼럼]고난의 끝에서 진실과 주님을 보리라

기독일보

입력 Apr 16, 2019 07:02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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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주님의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전 40일의 사순절이 두 주간 남았습니다. 주님의 작은 고난에라도 동참하기 위하여 애쓰는 분들이 계시는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영적인 일로 간주를 합니다. 고난이 우리를 깊게 만들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난에는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가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의 끝에서 주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을 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고난이 악을 드러내게 됩니다. 고난이 친구같이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같이 보이다가도 고난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했을 때 고난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고난을 통해서 존재를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철저하게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격을 일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까지 배신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의 실체가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분별력이라는 상금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통해서 금 같은 믿음을 준다고 말합니다. 귀한 믿음은 고난을 통과할 때 완성됩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깊은 말씀을 이해하게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천박함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난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바타의 나비 족 인사가 "I see you."(나는 너를 본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미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으로나, 깊이 없이 보면, 그냥 "나는 너를 본다."입니다. 그러면 뭘 보는가? 입니다. "의사는 사람을 보기보다는 상처만 본다면 더 이상 의사가 아닙니다. 교사가 학생을 보지 않고 학생의 성적만 본다면 그는 스승이 아닙니다. 우린 결코 너를 보고 있지 않고, 오직 나의 필요,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한다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비 족은 "I see you." 를 "너의 내면을 본다."로 씁니다. 어떤 때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쓰기도 합니다.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표면적 글만 아닌 이면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가슴을 읽는 깊이는 고난에서 옵니다. 그래서 고난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다면 사람을 깊이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요, 영적 맹인을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제대로 보고 살아야 합니다. 고난 없는 눈뜸은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끝에서 진실과 주님을 보리라." 말이 되어서는 안 되고 깊이를 보는 말이어야 합니다. 고난의 깊이를 알게 될 때 하나님 가슴을 읽을 능력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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