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속의 포스트모던 종교성, 다신교 시대로의 회귀

신화와 영웅들: 슈퍼히어로 및 신화 장르의 여전한 강세

2019년 4월 현재 영화계는 확연한 비수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대개 3-4월, 그리고 10-11월이 영화계 비수기로 지목된다. 이 시기는 연말연시나 명절, 가정의 달인 5월, 그리고 방학 시즌을 피해가는 때로, 극장을 향한 관객들의 발길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에 따라 배급사들도 이 시기 대작 개봉을 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현재 극장가가 바로 이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작년 한국 고예산 영화들(제작비 100억원 이상)의 연이은 흥행 실패가 해를 넘겨서도 이어지고 있다.

<자전차왕 엄복동>(150억원)과 <우상>(98억원)이 저조한 흥행성적을 보이며 스크린에서 퇴장했다. 관객들의 시선을 붙들만한 작품이 없다시피한 틈을 타, 평작 수준의 코미디 영화인 <극한직업>이 천만 관객을 넘어서는 기현상도 목격되었다.

이렇듯 한국영화 편으로는 볼거리가 마땅치 않지만, 외화 편으로는 여전히 강세를 보이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바로 슈퍼히어로 영화들이다.

3월에는 마블의 <캡틴 마블>(Captain Marvel)이, 4월에는 DC의 <샤잠!>(Shazam!)이 개봉해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다.

4월 말에는 <어벤져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현재 국내작들이 이 시기를 피해 개봉을 앞당기거나 연기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도가 높다.

미국 TV 시리즈(드라마) 편을 보더라도 슈퍼히어로 장르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얼마 전 종영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Umbrella Academy)는 마블과 DC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비주류 슈퍼히어로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슈퍼히어로 엄브렐러 아카데미
▲국내에는 비교적 생소한 슈퍼히어로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는 스타즈(Starz) 오리지널 시리즈 <아메리칸 갓>(American gods) 두번째 시즌이 방영 중이다. <아메리칸 갓>은 단순 슈퍼히어로 장르를 넘어 고대와 현대의 신들을 총망라해 등장시키는 작품으로 가히 새로운 시대의 신화라 할 만한 연출과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대중문화(특히 극문화) 전반이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상황은 기독교인의 관점으로 볼 때 달갑지만은 않다.

마치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처럼, 아니 그 당시보다 더 창의적이고 생생한 방식으로, 고대 영웅들과 신들의 이야기가 활발히 복원되고 있다.

기존에 운문이나 희곡, 혹은 회화나 조소 등의 방식으로 비교적 단순하게 묘사되던 영웅들과 신들의 활약은, 현재 CG와 촬영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다.

슈퍼히어로 및 신화 장르(코믹스와 영화)의 현대적 기원에 대해서는 이전 평론들을 통해 여러 차례 설명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 장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 속 다신교적 종교성의 부활에 대해서는 특별히 깊게 되짚어본 바가 없어, 금번 평론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신화와 성경: 슈퍼히어로 및 신화 장르 속 기독교적 요소

1930-40년대를 전후해 탄생한 슈퍼히어로 하위문화의 원 모티프는 성경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이 모티프는 오늘날에도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 가운데서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특히 전지구적 재앙이나 위기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는 인류를 구원해 내는 종말론적 구원자의 모습은 성경을 제외하고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모티프이다.

여기에 구원자 역할을 맡은 영웅이나 신적 존재의 죽음(혹은 임사상태)과 부활(혹은 회생)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성경적 요소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두 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서사는 우주종말을 앞에 둔 영웅들의 분투, 그리고 그들의 죽음과 부활이다.

분명 현재의 <어벤져스> 시리즈는 다분히 다신교적 분위기를 연출하지만(특히 영웅과 신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부터), 한편으로는 성경의 구원사적 서사요소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고전적 형태의 슈퍼히어로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샤잠!> 역시 성경적 서사요소를 차용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평범한 소년이 특정 사건을 계기로 거대한 능력을 얻고 이를 통해 상상하기 어려운 힘을 가진 악의 무리와 싸운다는 설정은, 약 30여년간 평범하게 사시다 요단강에서의 세례를 기점으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귀를 물리치시며 공생애를 사신 그리스도의 삶의 이야기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슈퍼히어로 샤잠
▲최근 개봉한 DC의 슈퍼히어로 영화, <샤잠!>

TV 시리즈 편으로 보더라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마블과 DC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고유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지만, 지구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이를 막으려는 슈퍼히어로 가문의 분투기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분명 성경의 구원론과 종말론을 염두에 둔 서사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그 동안의 슈퍼히어로 장르물 가운데서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다신교적 서사요소들과 기독교의 구원사적-종말론적 서사요소들이 절묘하게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 선호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방영되고 있는 <아메리칸 갓>에서는 이런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동안 슈퍼히어로 영화의 서사는 대부분 성경적 요소가 기본 골격을 이루고 다신교적 신화요소들이 그 세부적 내용을 채우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칸 갓>은 반대로 성경적 요소를 다신교적 서사의 한 부분으로 포섭하는 방식으로, 완성도 높은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아메리칸 갓>에는 종말과 구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설정상 한 분의 예수가 아니라 여러 민족 혹은 교단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표상하고 믿는 여러 명의 '예수들'이 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은 다신교적 신화의 신들과 동격의 신이었다는 <아메리칸 갓>의 설정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및 신화 장르 작품들의 서사구성 방식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 TV 시리즈는 옛 신들과 새롭게 등장한 현대의 신들 간의 싸움을 그린다. 이것이 이 작품의 중심 이야기다. 인류의 종말과 구원 여부는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이 신들 간의 싸움 가운데 여러 인간들이 죽거나 희생되거나 이용당하지만, 그런 것은 그저 신들에게 휘둘리는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들의 운명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이런 다신교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운명 사상은 고대 그리스 신화 가운데서 명백하게 목격되는 것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