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영방송 KBS를 통해 전파를 탄 도올 김용옥 교수(한신대 석좌)의 반(反) 이승만 발언은 사회 각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과격한 발언도 문제였지만,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는 기독교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故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기독교 장로였고, 독립과 호국 과정에 남긴 그의 발자취엔 기독교 흔적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금, 사회는 '이승만은 과연 누구인가?'라고 묻고 있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대답해야 할지도 모른다.

연세대학교 부설 이승만연구원 원장인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만났다. 2003년 연세대 교수로 오기 전엔 한신대 국제학부장 겸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80년대, 이른바 '수정주의' 시각을 담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집필에도 참여했다.

이런 이력과 '이승만 연구'가 언뜻 어색해 보인다. 그는 지금도 스스로를 '진보 학자'로 규정한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양심이 이 길로 이끌었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過)에 비해 공(功)이 비이성적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그를 인터뷰 했다. '이승만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한성감옥에서 초월적 신앙 체험
기독교 신앙 기초해 쓴 「독립정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나?

"처음 기독교와 접촉하게 된 것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전제독재에 반대했던 그는, 결국 한성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죽을 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 애국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현실이 그로 하여금 초월의 대상을 찾게 한 것 같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은, 이처럼 초월적인 것이었다. 그만이 독특했다기보다 초월성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나 자신이 홀로 하나님 앞에 독립적으로 서는 것 말이다. 오직 그 분과 나의 관계, 이것이 기독교 정신의 핵심이 아닐까? 이승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그런 초월적 신앙을 체험했다."

-이것이 또한 그의 「독립정신」 집필로 이어졌나?

"그렇다. 감옥에서 그의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서 써 내려간 것이 바로 「독립정신」이다. 우리는 그 안에 면면히 흐르는 우남(雩南,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의 기독교 신앙을 접할 수 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독립정신」에 나오는 글귀를 직접 찾아서 보여주었다. 「독립정신」은 현재 3권이 우선 발간된 「우남 이승만 전집」의 제1권으로, 전집은 총 30여 권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다만 천도가 있어서 지극히 광대하고 지극히 장원한데,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달아 실천한다면, 천지 만물을 만들어 홀로 다스리시며 만국의 만민을 다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직접 보는 듯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은 보시지 못하는 것도 없고 아시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나의 손으로 짓는 죄만 벌하실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도 살펴보고 계시니, 어찌 두렵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것으로 갚을 수 없고, 다만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일하는 것뿐이다.'

3.1운동에서 기독교 역할, '양'보다 '정신'에
「독립정신」 한문 대신 굳이 한글로 쓴 건...

-기독교 신앙과 '독립'은 어떤 관계가 있나?

"앞서 말했듯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초월성이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독립정신을 갖게 만든다. 종교개혁 이전만 해도 속죄의 기도는 스스로 할 수 없었고, 성경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거치며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독립된 사제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개신교 신앙은 독립정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와도 연결된다.

우리가 100년 전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했던 역할을 종종 조명한다. 그러면서 당시 33명의 민족 지도자들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위대한 일이지만, 단지 양적 접근에만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장소를 제공했느냐'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보다 본질적인 것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한다. '왜 기독교인들이 떨쳐 일어나게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다름 아닌 기독교 신앙이 가진 독립정신 때문이다. 그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지금의 우리도 성찰할 수 있다. '과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독립정신이 있는가?'"

이승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연구원

-이승만에게 있어 독립이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었나?

"흔히 독립하면 일본만 떠올린다. 그러나 이승만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독립은 본질적으로 인간 영혼에 대한 것이었으며, 일본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과거 조선을 억눌러 온 모든 것들로부터 마침내 이룩해내야 할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견지는 그의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초월적 눈으로 역사를 보고자 했기에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당시 조선은, 조선의 황제나 베이징의 천자를 신처럼 섬기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공맹사상을 도그마(dogma)로 만든 주자학에 기초한 중화주의는 조선의 정신마저 종속시켰다. 그의 역사의식은 병자호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것으로부터 이승만은 독립을 되찾고자 했다. 또한 그에게 있어 개인과 나라의 독립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라가 독립하자면 우선 개인이 먼저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대에 가히 혁명적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독립정신」을 한글로 썼다. 순 한글로 된 최초의 정치사상서가 바로 「독립정신」이다. 한문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사서삼경을 공부했던 그는 한문에 능통했다. 그가 굳이 한글로 쓴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백성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려...."

공산주의와 손 잡으면 자유 잃는다 확신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민족의 방향 제시

-이승만 전 대통령 하면 '반공'이 떠오른다. 이런 독립정신과도 관계가 있을까?

"독립은, 다른 말로 하면 자유다. 우남이 독립을 외쳤던 건, 당시 주자학적 세계관에 의해 자유가 억압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 그 중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인권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으로 생각했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일으켜 이 자유를 빼앗으려 했고, 우남이 이와 관련해 쓴 책이 바로 「한국교회 핍박」이다.

자연히 그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1923년 「태평양잡지」에 게재한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글이 있다. 여기에서 그는 공산주의의 합당한 점과 부당한 점을 열거한다. 합당한 것으로는 평등사상을 꼽았다. 그리고 부당한 다섯 가지 중 하나로 다름 아닌 교회를 없애려 하는 것을 들었다.

당시엔 소련의 힘을 빌려서라도 항일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던 때였다. 국무총리 이동휘도 그런 입장에 섰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대가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발로였다.

이승만은 이미 이 때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독립정신」의 마지막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마땅히 우리는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고,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영국·미국 등 각국과 동등한 나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

김명섭
▲김 교수가 이승만연구원 사무실의 한 벽면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고 있다. 액자 속 사진 인물들 중 맨 오른쪽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고 그 왼쪽에 있는 인물이 바로 프레데릭 B. 해리스 목사다. ⓒ김진영 기자

美의 6.25 참전에 해리스 목사 역할 커

-이승만을 논할 때 6.25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미국의 참전 결정에 그와 故 빌리 그래함 목사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질문을 하자 김 교수는 "미국의 참전 결정에 빌리 그래함 목사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있다"며 프레데릭 B. 해리스(Frederick Brown Harris, 1883~1970) 목사를 언급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지난해 그가 유지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원과 함께 발표한 논문 「프레데릭 B. 해리스의 한국관련 활동: 이승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대신한다.)

"해리스 목사는 1950년 초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대한민국 태극훈장을 받았고, 1956년 방한 시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리스 목사로 하여금 처음 코리아(Korea)를 위한 활동을 하게 했던 인물은 그가 목회를 담당했던 파운드리감리교회 교인이었던 이승만이었다. 해리스 목사의 한국 관련 활동은 주로 이승만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미관계의 역사나 한국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에 있어서 해리스 목사의 역할은 작지 않았다. 24년 동안 상원 원목(Senate Chaplain)으로 재직했던 해리스 목사는 한국 학계에서 이승만의 로비스트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로비의 대상이 될지언정 일개 로비스트가 아니었다. 해리스 목사는 미국 대통령은 물론 영국 수상, 중화민국 최고지도자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등 세계 지도자급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해리스 목사와 이승만의 관계는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 시기부터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까지의 한미현대사를 재조명하게 해준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휘하의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전면적 군사공격을 시작하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의회의 비준에 앞서 신속하게 미군을 파병했다. 해리스 목사를 통해 형성된 트루먼 대통령과 이승만의 관계는 이러한 신속한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들 중 하나였다.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파병결정에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보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6.25전쟁 발발 직후 그래함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코리아의 남쪽에는 인구대비 세계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들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당시 빌리 그래함은 31세의 소장목사였고, 전보를 보낼 당시까지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함 목사는 1950년 7 월 14일 처음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그래함 목사에 비해 해리스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이 부통령이던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 6·25전쟁이 터지기 약 한 달 전, 해리스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긴급 서한을 보내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한국의 이승만을 국빈으로 초청할 것을 요청했다. 해리스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한국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확인을 받았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이루어졌던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파병결정은 이러한 해리스 목사의 사전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6·25전쟁 기간 중 해리스 목사는 파운드리감리교회 성도를 중심으로 구호성금 및 방한용품을 모아 전난 중의 한국을 돕기도 했다. 그는 전후의 대한원조에도 관여했으며, 1956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방한했다."

-미국의 6.25전쟁 참전 결정엔 그들의 '기독교적 양심'도 작용했을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6.25전쟁이 자유, 특히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체제와의 싸움이라는 걸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존재를 알려준 인물들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해리스 목사나 그래함 목사와 같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이었다."

이승만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장례식 행렬. 서거를 애도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국민묘지까지 이르는 길을 가득 메웠다. ⓒ이승만연구원
이승만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미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명한 후 악수하고 있다. 덜레스 국무장관 뒤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이승만연구원

4.19만으로 평가하는 건 균형적이지 못해
공의의 눈으로 이승만 다시 봐주였으면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에 기여했고, 자유의 기초를 놓았지만, 4.19혁명으로 물러나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누구나 공과(功過)가 있다. 공만으로 그를 우상화해서도, 과만으로 그의 인생 전체를 매도해서도 안 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비록 애굽사람을 쳐 죽였고, 직접 가나안땅을 밟을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살인자로 기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지도자로 존경했다.

4.19혁명에 대한 기억만으로 이승만의 총체적 생애를 평가하는 것은 균형적이지 못하다. 대한의 독립과 호국의 과정에서 그가 보였던 리더십,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유례가 없는 동맹조약을 체결해 전쟁의 재발을 막은 공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가졌던 선각자적 면모는 당대 많은 이들의 영혼을 흔들었다. 1965년 이승만의 장례식 때 거리로 나왔던 백만 인파가 이를 웅변한다."

-끝으로 한국교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나님의 눈으로, 그런 공의의 눈으로 우남 이승만을 다시 봐주었으면 좋겠다. 우상화 하진 말되,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젠 그의 과오와 함께 그의 공로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성숙한 기독교 지성이 필요한 때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만큼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대한민국에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음껏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 그러한 나라를 만들고 지켜온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이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김명섭 교수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사, 정치학 석사, 파리1-팡테옹 소르본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 한신대학교 국제학부장 및 국제관계학부 부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있다. 제19대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역임했으며, 2015년부터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1980년대 「해방 전후사의 인식」 집필에 참여했으며, 「대서양문명사」, 「Northeast Asia and the Two Koreas」(공저) 등 역사정치학 분야 다수의 저서 및 학술논문들이 있다. 특히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은 2017년도 아시아학자세계총회 한국어 우수학술도서상, 2018년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각각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