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읽어라 

시대가 많이도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교인도 많이 변했다. 시대가 변하니 교인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설교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는 신학교가 시대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학도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설교는 여전히 해석 중심이다. 설교에서 중요한 구성을 활용하지 않는다. 이는 설교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어릴 적 먹던 음식과 지금 음식은 바뀌었다. 사람의 입맛이 변한 것이다. 어릴 적에는 거의 한국식이었다. 이젠 양식, 일식, 중국식, 베트남식, 태국식, 멕시코식, 이슬람식 등 다양한 입맛을 무장해야 한다.

교인의 설교 입맛도 변했다. 이 말은 설교가 지금보다 발전해야 함을 뜻한다.

언젠가 신학교 설교학 교수의 설교를 받아 본 적 있다. 이 설교를 회원들과 나누었을 때 들은 말이 있다.

"설교학 교수의 설교는 10년 전과 변한 것이 없네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놀랄 것 없다. 30년 전과도 변한 것이 거의 없다. 나의 주변의 설교자들도 그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과연 설교자들은 교인의 설교에 대한 원함과 필요가 달라진 것을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말씀이 변하지 않아야 하듯이 설교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교는 변해야 한다. 설교는 시대와 사람에 따라 변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성과 적용 등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의 설교 입맛이 변했다. 변했음은 물론, 듣고자 하는 설교가 더욱 까다로워졌다. 교인의 입맛이 까다로워졌다는 것은 기존의 설교 구성 틀을 바꿔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변하고 있다. 사람이 변했기에,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설교는 변하지 않은 것은 놀랍고도 놀라운 사건이다.

설교에 대한 교인의 변한 입맛에 대한 해결책은 설교의 구성이다. 설교에서 중요한 요소는 세 가지다. 첫째, 성경 해석이다. 둘째, 설교의 문학적인 구성이다. 셋째, 설교 글이다.

설교는 성경 해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의미(메시지)를 삶과 연결하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설교는 성경 해석에 머물고 있다.

가나안 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100만 명이 넘었다는 말이 들린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150만 명을 넘어 2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는 글을 읽은 적 있다.

가나안 교인들의 대부분이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변화되지 않은 목사의 의식과 발전되지 않은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 없기에 가나안 교인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 들어섰다.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한 시대다

사람의 원함과 필요가 바뀌니, 변화를 원하는 사람에 의해 시대가 바뀌었다. 교인이 원하는 설교가 바뀌었다.

설교가 전에는 내용만 좋으면 되었다. 이젠 좋은 내용만으로는 안 된다. 통찰력을 요구한다. 구성을 통한 낯설음을 요구한다.

전에는 설교 글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젠 설교에서 글이 중요해지고 있다. 필자는 설교 글을 쓰면 쓸수록 설교에서 글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그리고 설교의 구성을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설교자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글쓰기의 형식에 따라 설교할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은 내용보다 형식(설교는 구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내용이 형식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은 글을 쓸 줄 모르면 알기 힘들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콘텐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글을 쓸 줄 모르면 어떤 내용을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인 강원국은, 그의 책 《강원국의 글쓰기》에서 글의 '내용'과 '형식'의 중요성이 바뀌었다고 한다.

"과거엔 내용이 먼저이고 형식이 뒤따랐다. '무엇(내용)'이 우선이고, '어떻게(형식)'은 '무엇'에 종속되게 마련이었다. 이제는 형식이 '무엇'에 해당한다. 내용이 '어떻게'다. 글의 전개 형식을 '무엇'으로 결정하면 내용은 '어떻게'라고 채울 수 있다. 콘텐츠는 차고 넘친다. 구슬이 서 말이다. 꿰는 게 문제다"

내용을 글로 꿰는 것이 중요하다. 내용이 좋으면 뭐하나? 꿰지를 못하는데, 설교에 사용된 내용이 좋으면 뭐하나? 내용을 꿰지 못하는데.

설교는 논리적인 글이어야 한다. 논리적인 설교를 만들지 못하는데, 진리가 교인들에게 들려지게 할 수 있는가? 불가능에 가깝다. 글에서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면 설교자는 설교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구성이 설교를 맛깔스럽게 해 준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해석한 뒤 단어나 구절을 설명한다. 그 다음 연관된 성경 관주를 사용해 설명을 뒷받침한 뒤, 당위적인 적용을 하는 것으로 설교를 한다.

설교할 때 이처럼 매번 같은 구성을 하면 매 번 같은 듣는 구성을 듣는 교인들이 설교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리더란 앞서가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교인들과 다른 것을 통찰력을 주는 사람이다. 변한 시기에, 바뀐 입맛을 맞출 수 없다면 교인은 설교를 마음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교인의 입맛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교회의 리더다.

자녀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이 맛이 없으면, 잘 먹지 않고 깨작거린다. 교인은 설교자는 만들어주는 설교가 맛이 없으면 듣기를 거부한다. 사람이 맛있는 밥을 먹고자 하듯, 교인은 맛있는 설교를 듣고자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안에 황홀함 이상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는 것은 예수님 안에 내 영혼을 톡 쏘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맛이 없자, 교인들은 설교의 외식이 일상화되었다. 외식을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맛있는 설교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설교의 구성이다. 설교를 잘 하는 설교자는 설교 구성의 개수가 많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설교 구성의 개수가 적다.

필자의 아내는 밥을 먹을 때 반찬 가짓수가 많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외식할 때 식당도 반찬 가짓수가 많은 곳으로 간다. 설교도 구성이 많아야 맛있는 설교를 만들 수 있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구성 요소의 개수를 많이 활용하라

설교에는 많은 구성 요소가 있다. 서론인 도입이다. 설교에서 도입을 할 때는 낯설게 해야 한다. 그 다음, 제목을 잡게 된 동기와 이유, 심화(Why로 질문), What으로 질문, 적용, How로 질문, 개념 활용 본문과 연결, 하나님 사랑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현실과 연결, 삶과 연결, 영적 연결, 자기와의 연결, 전문가의 견해(인용), 명문장 사용, 책 인용, 단어 연구, 구절 설명과 연구, 등장인물 마음 연결, 제목의 마음 읽기,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 청중과 연결하기, 성경 관주, 예화 사용, 예수님의 비유법 중 한 단어 사용, 예수의 비유법 중 두 단어 사용, 결론 즉 마무리 등을 활용해야 한다.

필자의 책 중 하나의 제목은 《설교는 인문학이다》. 최근에 만난 꽤 많은 설교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설교는 인문학으로 해야 한다."

이전에 설교는 무조건 신학적으로 해야 했다. 필자가 책을 썼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교인들이 인문학적 설교를 원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책 《설교는 인문학이다》는 설교에서 '설교 구성'으로 작성해야 함을 강조한 책이다.

인문학은 설교에 있어 구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에서 구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설교를 할 때 설교구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 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 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 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 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자녁에는 축제로/ 좋은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