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쟁적이고 메마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자신의 성공' 이 그 무엇보다도 가치를 둔 시대이며, '나의 기준' 이 세상의 그 어떤 기준보다 더 중요성을 갖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타인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아마도 사치스러운 것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타인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남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감의 능력' 이다.

또한 요즘 시대와 같이 '소통' 이 중요한 시대는 과거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간에, 리더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해야만 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으로써 나는 '공감의 능력'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공감은 철저하게 '경청' 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19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라고 말하고 있다. 즉 타인과의 대화에 있어서는 '듣는 것'이 늘 먼저이고,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입보다는, 큰 귀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가정은 분명히 행복한 가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이들의 대화는 처음에는 '목마름' 을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존재의 본질적 갈증을 보신 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그 당시 그 여인은 자신의 기구한 삶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자신이 겪는 그 고통의 본질적 원인이 무엇인지 혹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상태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녀의 현실적 상황과 갈증을 단번에 해결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그 '공감의 능력' 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영적으로도 축복을 받게 된다.

요즘 세상은 온통 '공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세상적인 공감'이 아닌, '영적인 회복'을 구해야 한다. 단순한 '감정의 터치' 보다는, 그 깊은 '가슴의 소리'를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깊은 '가슴의 소리'를 들어 줄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분은 세상의 슬픔과 위로를 넘어서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분으로 그의 이름은 바로 "예수님" 이시다.

 

피터정 선교사 (코칭한국 국제협회 대표)
(Photo : ) 피터정 선교사 (코칭한국 국제협회 대표)

세상은 우리를 과거에 얽매이게 하지만, 예수님은 현재를 너머 미래를 바라보게 하신다. 세상이 우리를 과거 속에 묶어 놓고 그 덫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현재의 고난을 해결하시고 미래의 축복을 더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단순하게 감정을 터치하거나 과거의 슬픔을 위로 받기보다는 예수님을 통한 온전한 '삶의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바로 '공감'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억눌리고 핍박당하는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분은 이웃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처럼 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감의 자세' 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아마도 주님은 당신의 삶이 진정으로 공감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는지 궁금하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