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박욱주 교수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박누리 감독의 영화로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돈>을 분석합니다. 영화 <돈>은 배우 류준열(조일현 역), 유지태(번호표 역), 조우진(한지철 역), , 진선규(박창구 역), 김재영(전우성 역), 김민재(유민준 역), 정만식(변차장 역), 원진아(박시은 역) 등이 출연하며, 여의도 증권가의 주식 브로커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돈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꽃, 증권과 기독교 신앙

금번 개봉한 영화 <돈>은 대규모 주식거래로 주가를 조작하는 작전세력과 그에 놀아나는 한 증권회사 직원(브로커), 그리고 이 둘을 쫓는 금감원 직원의 머리싸움을 담은 영화이다. 주식 작전세력이나 증권회사 직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지금까지 국내와 해외를 합쳐 여러 편 제작된 바 있다.

미국에서는 <월 스트리트>(Wall Street, 1987), <갬블>(Rogue Trader, 1999), <마진 콜>(Margin Call, 2011),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he Wolf of Wall Street) 등이 있고, 일본에서는 공매도 작전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빅머니>(2002)가 있으며, 한국에도 <공공의 적>(2002), <작전>(2009), <여의도>(2010), <찌라시: 위험한 소문>(2014)이 있다.

이처럼 유사한 작품들이 조금씩 각도를 달리해 계속 제작되고 개봉된 터라 <돈>으로부터 내용의 참신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그리 참신하지 않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영화들이 반복적으로 제작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죽음(전쟁과 범죄)과 에로스(연애와 성애)에 대해 갖는 것만큼이나, 돈(물욕)에 대해 갖는 원초적 관심 역시 무시할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증권 혹은 주식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금융상품이다. 자신이 투자할 수 있는 여력 안에서 특정 사업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도전이자 유혹이다.

증권투자와 매매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됐다. 통상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나 18세기 초 영국의 사우스 시 회사(South Sea Company) 투기사건을 근현대 증권시장의 출발점으로 지목하지만, 이 두 사례는 그 투기의 규모 및 여파가 워낙 거대해서 유명해진 것이지, 증권투자 및 매매 관행이 그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경제 역사를 다루는 이들 가운데는 주후 2세기, 고대 로마시대 당시 푸블리카니(publicani)라고 하는 유한책임회사를 증권투자 및 매매의 원형으로 지목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상당수는 자본주의 경제질서 안에서 살고 있다. 당연히 적지 않은 수가 개인적으로 증권투자나 매매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일부는 아예 증권투자 관련업무를 생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도 존재한다.

이쯤 되면 한 번 정도 의문이 들 법도 하다. 자본주의는 과연 하나님의 뜻에 걸맞는 경제원리인가? 그리고 자본주의 꽃이라 불리는 증권투자는 과연 기독교인이 신앙양심상 아무 거리낌 없이 손댈 수 있는 일인가?

영화 돈
▲증권투자는 자본주의의 꽃이자 정점으로,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관심을 갖고 접하게 되거나 아니면 거기에 인생을 바치기까지 하는 생업이 되기도 한다.

<돈>과 같은 영화를 보면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삶은, 돈을 추구하다 못해 숭배에 빠지게 되는 그 저속한 삶의 양태가 윤리적으로든 법적으로든 인간을 제법 손쉽게 타락시키는 듯하다.

특히 그 정점에 속한 증권투자는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돈뭉치를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인간에게 심어주고,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능력보다 과분한 꿈을 꾸다가 결국 추락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맞상대라 할 수 있는 경제사상, 즉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비교하면, 적어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유로운' 경제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자본주의가 신앙인들의 삶에는 적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세의 평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모든 신적-종교적 권위와 질서를 무력화하려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비교해 보면, 자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인이 곁하여 살아가기에 오히려 적합한 경제체제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상은 그 속성상 두 가지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과 부합하는 대신, 한 가지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측면을 갖는다. 아울러 증권투자 역시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바람직한 측면과 그렇지 못한 측면 양측이 혼재한다.

이번 회에서는 우선 자본주의의 핵심적 속성에 대해 신앙의 입장에서 고찰하고, 영화 <돈>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길어낼 수 있을지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다음 회에서는 증권투자 및 매매의 관념적·미래적 속성과 지극히 기만적인 측면을 역시 신앙의 눈으로 짚어볼 것이다.

영화 돈
▲자본주의 체계는, 그리고 그 첨단에 위치해 있는 증권투자는 기독교 신앙 입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돈과 신앙: 신앙의 정신과 자본의 마력

근대 사회학의 아버지는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이지만, 그의 업적을 이어 현대 고전 사회학 이론을 세부적으로 정립한 3대 선구자라 하면 통상 세 사람을 떠올린다. 바로 칼 마르크스(Karl Marx),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그리고 막스 베버(Max Weber)이다.

이 가운데 베버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20)에서 근현대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16세기의 칼빈주의 직업관과 경제관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칼빈의 직업소명설이 근면과 성실, 그리고 합리를 바탕으로 삼는 건전한 노동 및 경제윤리 창도에 이바지했고, 이에 따라 개혁주의 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자본주의가 크게 발흥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베버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 특히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이 긍정적 영향을 준 부분은 자본주의가 인간으로 하여금 근면과 합리에 기반해 경제활동을 영위하도록 한다는 점에 국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절제된 경쟁심을 바탕으로,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힘써 노동하는 그런 정신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는 뜻이다. 베버는 순전히 돈을 향한 욕망에 함몰된 배금주의나 이익 극대화에 천착하는 행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소 과도하게 요약했지만, 위 내용으로만 본다면 베버는 자본주의의 극점이라 할 수 있는 금융 산업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경계심 어린 태도로 바라볼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돈놀이, 즉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어찌보면 불로소득과 같은 행위를 지극히 정당한 경제행위로 가르친다는 점이다.

영화 돈
▲베버의 관찰에 의하면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 특히 직업소명설은 근면성실한 노동윤리를 정립하는 데 기여함여 근현대 서구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은 종들'에 관한 비유(마 25:14-29)에서, 예수께서는 손실이 두려운 나머지 맡겨놓은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 노동, 혹은 투자 행위를 하지 않고 감춰놓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질타하고선,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당시 유대 사회에 '변리' 즉 이자를 받는 사채놀이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고, 예수께서도 이 경제 문화를 인정하셨음을 시사한다.

상기해야 할 점은 구약에는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는'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하셨다는 사실이다(신 23:19-20). 그런데 여기에서도 예외는 존재한다. 바로 이스라엘 외의 외국인에 대해서는 이자를 받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구약의 계명을 해석해 보면 일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이자놀이를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봉헌된 헌금을 가지고 성도들을 대상으로 사금융업을 영위하는 것 역시 비성경적이다.

실제로 논평자는 평신도 시절부터 목회를 담당하는 지금까지 교회 내 돈거래와 이자놀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시 신앙생활에까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사례를 무수하게 목격해 왔다.

다만 신자들 개개인이 여유자금으로 법적 절차에 따라, 그리고 법정이율의 한도 내에서 교회 외부인들에 대해 돈을 빌려주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일종의 금융행위이고 투자행위이다. 돈이 투자행위가 되는 순간, 그것은 금액에 상관없이 자본으로 변한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에서 단순한 현찰과 자본화된 현찰을 가르는 기준도 바로 이 금융행위 여부에 있다.

통상 회계적 개념에서, 특히 인수합병 회계에서 인수대상이 되는 기업이 보유한 현찰의 가치는 그 액면가대로 계상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연도(통상 5년)의 복리이자가 부가된 만큼의 가치대로 계상한다.

그 이유는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찰은 그것이 경영이든, 아니면 이자확보를 위한 은행예금이든, 어떤 측면으로든 투입되어 운용되고 그에 합당한 변리 혹은 이윤을 창출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상 현금의 미래가치라 부른다.

영화 돈
▲'자본'이 되어버린 현금은 더 이상 죽은 돈이 아니라 미래가치를 가진, 살아있는 재화가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성경은 달란트가 가진 이 미래가치를 수긍한다. 그리고 이 미래가치를 얻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적으로 장사하고, 노동하고, 합리적 판단을 위해 힘쓰는 것을 권장한다. 즉 공정한 경쟁체제에 따른 근면성실한 노동을 권장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달란트를 맡긴 종들에 대한 예수의 비유가 실제 이익 추구만을 목적으로 삼는 금융행위나 투자행위에 인생을 다 내맡기라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계명을 수행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헌신하는, 최선을 다해 '달음질하는 믿음(고전 9:24)'을 갖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측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각에게 허락해 주신 은사와 모든 자원들을 투입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사용하는 노동 및 투자행위라는 측면에 있어서 자본주의 정신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엄격한 사유재산 개념, 그리고 물신화 성향은 기독교 정신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달란트로 이익을 낸 종들이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재화를 모두 주인 앞에 드렸던 것을 기억하자.

실제로 사도들의 전도에 의해 부흥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헌신하고, 이 헌신한 바를 각각의 필요에 따라 구제하고 나누는 데 사용함으로써(행 4:35)"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켜냈다.

자본주의는 경쟁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권장한다. 그리고 현세에서 그 이익을 향유하는 것 역시 공정한 것이라 수긍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르게 가르친다. 경쟁적으로 결실을 내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권장하나, 그 결실을 사익을 위해 사용하고 소유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영화 돈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가진 바 재물을 모두 헌신한 뒤, 원시공산체제를 이루어 매일 성전 뜰에 모여 말씀을 배우고 증인이 되는 삶을 실천했다. 사진은 파괴되기 전 고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본뜬 모형.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거의 완벽한 원시 공산주의 체제를 갖췄다. 헌신된 헌금으로 각 성도들이 하루하루 양식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배우고 배운 바를 실천하도록, 증인이 되는 데 힘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힘썼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오늘날 여러 지도자들이 헌금을 사유화하는 행태는 성도들에 헌신에 대한 명백한 배임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개개인의 사유재산 개념, 그리고 이것을 각자의 마음에 따라 처분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개념이 권장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이 땅에 쌓아두고 누리면 결국 썩어질 물질에 불과한 것이 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사용한다면 곧 영원히 썩지 않을 상급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일단 돈 자체는 그저 써버리는 물품이요, 무생물적 재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투자에 동원되는 자본은 죽어있는 물질이 아니다. 자본에는 사람의 미래적 욕망이 투사된다.

그래서 자본은 활발하게 통용된다. 항시 움직이며 그 위세를 불려가려 한다.

만일 이를 인간이 통제하지 못할 경는, 그것을 굴리는 인간과 거기에 휘말리는 인간들 모두를 지배해 버리는 괴물과 같은 생명력을 갖는다.

이로써 자본은 운용하는 도구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변한다. 이런 현상을 마르크스는 비판적인 시선을 담아 물신화(物神化)라 불렀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이 물신화를 엄히 경계한다.

영화 <돈>은 증권투자라는 금융행위, 투자행위에 얽힌 인간군상의 부도덕함과 나약함을 비추며, 자본이 유발하는 물신화 현상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전문 작전기술자 번호표(유지태 분)는 매매를 통해 타인을 조종하고 회사를 망가뜨리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다가 범법자로 전락한다. 이 일에 결부돼 돈맛을 본 증권사 직원 조일현(류준열 분)은 거기서 헤어나오기 위해 상당한 고통과 대가를 치른다.

자본의 잔악한 마력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난 조일현이 작전기술자 번호표에게 마지막에 던진 물음이 이 영화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한다. "그동안 모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영화 속에서 번호표가 번 돈의 규모는 아마 수백억원 대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류의 영화가 전달하는 내용, 교훈은 결국 한 가지다. 돈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본의 힘에 먹히는 자는 끝내 불행과 허무에 빠지게 될 뿐이라는 것.

이는 일반 사회윤리 측면에서의 교훈이지만, 기독교 신앙 입장에서는 달란트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공동체 형태를 유념할 때, 신앙과 직결된 교훈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 이것이 지켜지는 한에서는 자본주의 체제가 다른 어떤 경제체제보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적합한 경제사상임에 분명할 것이다. <계속>

영화 돈
▲영화 <돈>. 자본의 마력에 먹혀버린 나머지 파탄에 이르는 인생들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교훈은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도 유념해야 할 교훈임에 틀림이 없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