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인문학의 공통점!

원숭이,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다. 사람들의 구경거리란 것이다.

설교자에게 인문학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원숭이와 별 다를 바 없다. 설교자들이 인문학은 구경거리 대상이란 것을 10년간 설교자들과 호흡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이런 현상은 보수신학을 한 설교일수록 심하다.

세상은 인문학의 시대가 왔다고 떠들어댄다. 아니, 이미 인문학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런데도 설교자에게는 인문학이 아직도 구경거리다. 그래서 슬프고 또 슬프다,

인문학은 인본주의?

설교자에게 인문학이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인문학'은 '인본주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인본주의라고 규정되면 구경 외에는 할 것이 없다.

필자도 '인문학'은 '인본주의'라고 배웠다. 그 결과 신학을 한 이후 인문학은 일종의 '사단'이었고, 우상숭배였다. 접하는 그 자체가 죄책감의 출발점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에 입학한 후 10년 넘게 인문학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것이 경건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게 인문학은 악의 화신이었기에,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인문학을 해야 하는 수준

필자가 신학을 할 때는 인문학이 나라의 한복판에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인본주의'라는 말이 낯설지 않고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인문주의가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최진석 교수는 그의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우리나라가 인문학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나라의 위상이라고 말한다.

"나라와 사회 초기 단계는 정치학, 법학이 발전한다. 좀 더 발전하면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이 발전한다. 더 발전하면 인문학이 발전한다. 그리고 최고로 발전한 나라는 고고학, 인류학이 중요 학문으로 부상한다."

그는 덧붙이길, "인문학이 발전된다는 의미는 문명과 인간의 흐름을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미래를 위한 비전과 메시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러, 이제 메시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 선택, 판단해야 하는 정도로 나라의 수준이 올라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인문학을 해야 하는 수준의 나라에 진입했다. 우리나라는 국제법상 전 세계 239개(비독립국 포함) 국가 중에서 7번째로 '30-50클럽'에 가입된 나라다,

'30-50클럽'이란 국민소득이 3만 달러이면서 인구 5000만 명이상인 국가를 말한다. 2018년 말 현재 '30·50클럽'에 이름을 올린 국가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한국 등 총 7개국이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 오히려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가 '30·50클럽(국민소득 3만 달러·인구 5000만 명)'에 진입한 것은 처음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인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 되는 나라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인문학을 설교에 활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인은 인문학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인문학자여야 한다

우리나라가 인문학을 해아 하는 수준의 나라라면, 설교자도 마땅히 인문학을 해야 한다. 아니, 설교자는 우리나라의 지도층에 속하므로 인문학에 능통해야 한다. 그럴 때 세상과 익숙한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아직도 설교자들은 인문학을 구경거리로 삼고 있으니 안타깝다. 하지만 봄이 오면 얼음이 깨지듯, 지금 서서히 '인문학은 인본주의'라는 등식이 깨지고 있다.

필자의 저서 중 하나가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이다. 이 책은 10년 동안 5,000여권 이상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저절로 터득되어 쓴 책이다. 설교는 인문학과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에도 다른 목소리로 '설교를 인문학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필자가 목사 초기 때 자주 듣던 말이 있다. 당시 소망교회 담임 곽선희 목사님이 독서를 강조하면서 설교집, 에세이, 단편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설교가 '인문학'인 것은, 설교에서 '구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구성'은 인문학 영역에 속한다. 다른 말로 설교는 문학적 요소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인문학에 구경거리가 아니라 '관심거리'여야 한다.

설교자들의 서재는?

나는 설교자들을 만날 때마다 서재 들여다보기를 좋아한다. 책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의 서재 8할 이상이 신학서적으로만 꽉 차 있다. 최근에 본 지인의 서재도 신학 서적뿐이었다.

최근에 아트설교연구원 한 회원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도 그의 지인의 서재 책 중 100% 가까이 신학 서적이었다.

설교자는 신학 서적을 읽어야 한다. 이는 당연하다. 동시에 인문학 책도 읽어야 한다. 교인에게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서재에 신학 책만 꽂혀 있는 것은 설교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을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다.

필자도 신학 후 20년까지는 서재에 신학 도서만 있었다. 그 이유는 신학 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ㅈ의 무지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결혼 초부터 아내가 인문학 책을 읽으라고 하면 "목사가 성경책과 신학 책만 읽으면 되지, 왜 세상 책을 읽어야 해!"라고 반문했었다.

설교자들의 서재에 균형이 필요하다. 신학과 인문학의 균형이 5:5는 아닐지라도, 신학 7에 인문학 3 정도는 돼야 한다.

설교자에게 인문학은 '관심거리'여야 한다

설교자에게 인문학은 관심거리여야 한다. 관심거리 대신 구경거리가 되면, 세상은 점점 교회를 멀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관심거리다. 반면 설교자에게는 여전히 구경거리다.

설교자들은 청중의 관심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교인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면, 설교자는 인문학에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손자병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인문학이 관심거리가 되어아 하는 이유는, 설교자는 하수가 아니라 고수처럼 설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수는 하수를 이해한 뒤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하수는 먼저 윽박지르기부터 한다. 고수는 절대 윽박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세상을 윽박질러 왔다. 이 윽박지름이 20세기 때는 먹혔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도리어 반발만 산다. 아니 상종 못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교회는 세상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 세상이 교회를 구경거리로 삼으면 기분이 나쁘다.

교회가 세상의 관심을 받으려면, 인문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해야 한다. 인문학을 구경거리에서 관심거리로 바꿔야 한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는 인문학을 중시했다

한국교회가 가장 많이 언급하고 배우려는 것 중 하나가 미국 초기 청교도다. 미국 초기 청교도들이 정착 초창기에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 어떤 교육 제도를 택했는가를 알기만 해도 설교자가 인문학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다.

전 세계 고등학생들이 가장 입학하고 싶은 대학, 세계 최고의 대학은 누구나 알듯 하버드 대학교이다. 국제기독교대학 인문학과학과 교수인 모리모토 안리는 그의 책 《반지성주의》에서 미국 초창기 청교도들의 하버드대학교의 교육 편재를 이야기 한다.

당시 청교도들의 인구가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 단계에서, 청교도 지도자들은 하버드 대학교를 세웠다. 세운 목적이 '현재의 목사들이 죽고 나면 누가 교회 설교를 할 것인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버드대학교는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 체계를 신학 일변도가 아니라 인문학을 기초 과정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한 일반교양 교육은 청교도 목사에게 필요한 전문교육 그 자체였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이 인문학 교육이었다.

청교도 초창기 설교자 양성을 위한 하버드대학의 학위 취득 단계는 아래와 같다.

첫 단계가 교양학 학사다.
두 번째 단계가 교양학 석사다.
세 번째 단계가 신학 학사다.
마지막 단계가 신학 박사다.

이는 한마디로 하버드 대학교의 목사 양성 교육은 신학 교육이 아니라 일반교양 교육(인문학 교육)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한 것은 하버드 대학교가 택한 성직자 최적의 교육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초기 청교도들은 인문학의 기반 위에 신학을 가르쳤다. 그 말은 설교자는 인문학이 갖추어야 할 선행지식이란 뜻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인 칼빈과 츠빙글리가 신학자이기 전에 인문학자였다는 데서도 인문학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우리나라 설교자들에게도, 인문학이 구경거리가 아니라 관심거리여야 한다. 나아가 인문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어야 한다. 즉 인문학자여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하나님 편으로 효과적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장착된다. 이는 미국을 벌벌 떨게 한 북한의 미사일(ICBM)보다 강력하다.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자녁에는 축제로/좋은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