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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목사의 한국교회사] 한국 교회와 3·1 독립운동 (IV)

기독일보 news@christianitydaily.com

입력 Mar 14, 2019 11:24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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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관여문제 및 결과

선교사들의 관여문제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지키는 원칙 유지
"만행에 대해서는 중립이 아니다"

3·1 독립운동 당시 선교사들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하는 점은 관심의 초점이 되는 부분이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고 나서 이 일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선교사들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출되었는데, 이 일을 적극 지지한 사람으로부터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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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선교사들은 선교 현지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중립을 지킨다는 원칙에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교회나 교인들이 정치적인 면에 깊이 관여하여 신앙적인 면 이외의 문제에 빠져들어, 그런 문제로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생활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한국민들이 항일을 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 지원은 할 수 있어도 직접적인 지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3·1 독립운동 시 선교사들이 설 수 있는 위치는 분명해진다. 즉 정신적 내지 도덕적 지원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립의 위치에 섰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이 거사를 몰랐을 수도 있다. 이 거사에 대해서 일제의 경찰이나 헌병 조직조차 전혀 모르게 진행된 사실을 본다면, 또 알았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잘하라는 격려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만류도 양자 모두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추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적인 시위를 일제가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교회와 교인들의 피해가 엄청나게 나타나기 시작하자, 선교사들은 이런 사태에 중립적인 태도만 취할 수는 없었다. 마펫(S.H.Moffett) 선교사가 “만행에 대해서는 중립이 아니었다.”고 한 말에서 정확히 표현되었다. 일제는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우편, 철도를 감시하고, 보도기관에 압력을 가해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만행은 해외에 즉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서울시 행운의 열쇠를 받은 스코필드 박사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서울시 행운의 열쇠를 받은 스코필드 박사

이 일을 알린 사람들 중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ofield 石虎弼 1889-1870) 박사였다. 그는 일본 군인들이 제암리에서 저지른 야만적 행위를 사진찍어 해외로 보냈고, 또한 「꺼버릴 수 없는 불」(Unquenchable Fire)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였다. 그가 보낸 사진과 보고서가 세계의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 시위운동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미국 교회의 지원은 큰 역할을 했다. 배재학당 교장이며 감리교 평신도 지도자였던 신흥우(申興雨)는 1919년 5월 미국에서 열리는 미 북감리교회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출국하였다. 그는 그 대회의 의장이었던 노드(F.M.North)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한국의 시위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이 사실은 곧 미국 교회연합회(FCCCA) 실행위원회에 알려졌고, 이 실행위원회에서는 사실을 조사한 뒤 보고하도록 결정하였다. 그해 4월에 이 위원회는「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이라는 제목의 소책자 5천 권을 발간하여 세계에 배포하였다.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는 이 책자를 국회에 제출하였고, 일본정부에도 박해의 즉각적인 중지와 한국에서의 행정적 개혁을 요구하는 전문을 그 해 6월 26일 일본 수상에게 보냈다. 미국 정부도 주미 일본 공사에게 납득할 만한 해명과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로써 3·1 운동은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일제는 세계의 여론 앞에 굴복하고 그들의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이다. 그 해 5월에 개최된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에서도 한국교회에 대해 동정을 표하고 그들의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조건들의 개선을 찾는 데 도덕적 지지’를 한다는 뜻을 표했다.

선교사 개인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모우리(E.M.Mowry 牟義理 1880-1970)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한 학생들을 자기 집에 은신시키고, 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선교부에 보낸 혐의로 6개월 징역형을 구형받았다.

모펫 선교사
새뮤얼 모펫 선교사(Samuel Austin Moffett, 마포삼열, 1864~1939)

선천 신성학교 교장 맥큔(G.S.McCune)은 그 지방 교회 지도자들과 운동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추방당했고, 마펫 목사는 세계 선교사대회에서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구금당했다. 충청도 강경에서는 동양 선교회 소속 토마스 목사가 운동에 협조하다가 헌병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서울의 감리교 선교사 노불(W.A.Noble), 빌링스(B.W.Billings 邊永瑞 1881-1969)도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하다가 박해를 받았다. 한편 부산의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의 데이비스(Miss Davies) 양과 혹킹(Miss Hocking) 양이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수 시간 동안 심문을 받은 후에 풀려났다.

선교부가 사전에 조직적으로 운동에 협력 또는 사주한 일은 없었어도 개인적으로 교회의 피해에 분개하고, 몰래 지원한 일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관여에 대해서는 사건 전에는 관여가 없었으나, 사건이 진행되면서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선교부 단체로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힘을 모아 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 과 : 정치적 독립에 실패했으나 독립에 대한 욕구 세계에 천명

1. 민족의 결집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창설
3.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 더욱 간교한 식민통치 획책
4. 기독교 위상의 변화 - 외래 종교에서 가장 애국적인 종교로

3·1 독립운동의 결과는 무엇인가? 3·1 독립운동의 결과는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렵다. 비록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는 성공한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운동은 한민족이 독립의 강렬한 의지를 일제에, 그리고 세계에 알리는 위대한 일을 수행하였다. 이 운동이 비록 정치적 독립은 달성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많은 성과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운동은 민족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 동안 여러 요인으로 내부 분열이 없지 않았던 민족이, 이 운동의 단일한 목적을 위해 한마음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미국이 영국과 독립 전쟁을 할 때 다양한 종족적, 언어적, 문화적 배경 때문에 분리되어 있었던 13개 주의 식민지 주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쟁에 나가 결국 승리를 가져온 사실에 견줄 수 있다.

둘째로, 이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창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9년 겨울, 상해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는 비록 망명 정부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에 정부가 존재한다고 하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이 임시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구성원 8명 가운데 7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교회사에서도 기억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정부는 민주공화제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3·1 독립운동은 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재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셋째로, 이 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한국 통치 방법을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정치로 바꾸도록 하였다. 세계의 압력에 굴복한 일제는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총독을 소환하고, 해군대장 제등실(齊藤實)을 새 총독으로 세웠다.

그는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회견을 갖고 정치는 다른 개혁과 같이 국민의 행복을 촉진하는 일과 언론과 보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에 공헌할 것임을 말했다. 제등실은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한국민들에게 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그는 9월에 취임하고 나서 관제개혁을 단행하여 헌병제를 철폐하고 보통 경찰제를 실시하였다. 일반 관리들이 칼을 차는 것을 금지하고, 한국인 관리의 임명과 급여 규정을 바꾸고, 국문신문(國文新聞)을 허가하고,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등의 개혁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구호에 그쳤고 실제로는 더욱 간교한 방법으로 식민지통치를 획책하였다. 헌병들은 제복만 바꾸었을 뿐 대부분 경찰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경찰력의 증강은 자연스러웠다. 1919년 경찰력은 그 전에 비해 3배로 늘어났고, 1920년에는 경찰관 주재소(駐在所)가 없는 마을이 거의 없게 되었다. 기독교에 대해서 새 총독은 9월에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었는데, 그때 선교사들은 총독부에 대해 ‘연합종교 회견백서’를 제출하면서, 일본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현행 법규 아래서는 이러한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구하였다.

- 교회 및 선교사에 대한 단속을 완화할 것.
- 기독교 및 기독교인에 대한 관리의 차별을 철폐할 것.
- 기독교계 학교에서의 성서교육과 종교의식을 허용할 것.
- 한국어의 사용 금지를 조속 철폐할 것.
- 조선 학생들도 일본 학생이 누리고 있는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누릴수 있게 조처하고,
교과서의 선택권과 한국어 및 세계 역사의 학습에 대한 제한을 철폐할 것.
- 총독부가 허가한 사립학교 졸업생이 공립학교 졸업생과 똑 같은 특권을 가지게 해줄 것.
- 기독교 문서에 대한 검열을 철폐할 것.
- 교회의 출판물 발행의 제한을 완화할 것.
- 교회 및 선교기관을 재단으로 인정할 것.
- 기독교인으로서 구금된 정치범에 대한 학대를 중지할 것.
- 형무소의 교화사업에 교회가 참여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할 것.

   제등실은 선교사들의 이런 건의를 받아들여 ‘포교규칙’을 개정하였고, 과거의 시책을 수정, 완화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가 다음 글 속에 나타나 있다.

……기독교, 불교 등에 대하여서는 관제 개정 후 특히 학무국의 일과로서 종교과를 설치하고 이것을 관할케 하였다. 이 종교과 설치의 일사(一事)는 종교 행정을 중시하고, 사회 교화의 임무를 원조하는 방침의 표현으로서 종교가로부터 호감을 사고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는 우선 그들에게 접근하여 오해를 풀고 신정(新政)의 정신 및 실제의 시설을 양해시키는 것이 급무였다. 이 점에 대하여 총독은 높은 위치에서 대관(大觀)하여 그들을 회유하였다.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션학교의 감독 및 개선이었으나, 이것은 사립학교의 규칙을 개정하여 방침을 분명하게 하고 감독을 엄하게 하였으며, 또 포교규칙을 간이화하고 종교단체를 법인으로서 인정하여 사회 교화의 사명을 달성시키는 데 유감이 없게 조치를 취하였다.

개정된 포교 규칙은 교회당, 포교소 설립을 과거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고 신고사항도 간소화했으며, 종교 규칙 위반자에게 벌금형을 삭제하였고, 포교 수속의 간편과 포교자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한 흔적이 보였다.

기독교에 대한 종래의 정책을 변화시켜 화해를 시도하고 특히 문제가 되었던 기독교 학교에서의 성서교육과 예배의식의 허용은, 비록 도덕과 일본어 과목을 요구하기는 했으나, 이 운동이 가져다 준 값비싼 대가였다. 또한 총독부 학무국에 종교과를 두고 전도인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일본인 기독교인 3인을 임명하여 근무케 하는 형식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을 일제가 기독교에 온전한 자유를 주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잘못이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와 학생예배에 참석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여……규제하려 했다.……여러 가지 혐의를 걸고 학생들을 체포하고, 또 모든 출판물을 검열했으며, 때로는 교회 주보의 기사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등실은 밀주의 자유화, 담배 재배의 자유화란 명목으로 교회가 줄기차게 전개해온 금주, 금연 정책을 교묘히 와해시키는 악랄한 법을 만들어 시행케 하였다.

넷째로, 이 운동은 한국민들에게 기독교가 더 이상 외래종교가 아니고 가장 애국적이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라는 개념을 주지시켰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이래로 이런 거족적 민족운동에 대규모로 참가하여 처음부터 이 일을 선도해 나간 종교는 천도교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시위를 선도한 인사들이나 체포된 사람들의 숫자에서나 예배당, 학교 등 기관과 인적, 물적 피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조국을 잃고 죽는 영혼은 천국에도 못가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노래를 교회 안에서 부를 정도였고, 많은 애국의 노래를 부르며 조국 독립의 염원을 불태우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운동이 끝나고 나서 한국인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결과도 뒤따랐다. 1921년, 일반적인 백성들의 견해가 기독교에 대해 무척 호의적이라고 선교사들은 기록하였다. 한 선교사는 1923년 한 해 동안의 수세자가 지난 3년 동안의 숫자와 맞먹는다고 보고하였다. 이 운동에서 기독교는 ‘주체가 아니고 통로’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기독교가 확실히 주도를 했던 운동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평양에서 사역하던 감리교 의료 선교사 홀(R.S.Hall)도 “조선 민중들은 이 때 처음으로 기독교인들도 조선의 애국자들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3·1 독립운동은 비록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한국민이 온 세계에 결집된 독립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천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교회는 그 동안 꾸준히 전도하고 교육하여 길러 온 나라 사랑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민족의 운명과 같이하는 민족종교로서 그 자리 잡음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는 데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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