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님, "북한에 두고 온 김복순을 찾아 데리고 오라" 부탁하셔 
北 교인,“통일이 되면, 이곳에 다시 교회를 재건할 계획이 있는가”
주일이면 예배당 자리를 돌며 침묵으로 주일 성수
북한으로 밀수된 성경 통해 자생적으로 그리스도인된 청년 만나기도 

복음통일 전문가 세미나가 진행되던 2월 14일, “북한지하교회의 실체와 성도의 신앙”을 강의한 강석진 선교사를 세미나 장소인 파세디나 사랑의빛 선교교회에서 만나 그들의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강석진 선교사
(Photo : 기독일보) 강석진 선교사

강석진 선교사는 1992년 압록강 건너편 중국 단동 지역에서 북한선교를 시작해 북.중 접경지대에서 탈북민과 북한 지하교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왔으며, 극동방송을 통해 대북 설교 방송과 통일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현재 ‘북방선교회’, 충주양의문교회’, ‘새하늘선교회’ 소속되어 선교 담당 목사로 섬기고 있다. 2015년 북한 실존 인물을 소설화 한 “오래된 소원: 반세기만에 평생 소원 이룬 북녘의 나오미 감동실화”를 펴낸 바 있다.

-사역을 소개해 주세요.

92년 신의주 건너편인 압록강 단동지역에서 븍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백석 교단 소속 선교사입니다. 91년도에 하얼빈 지역 조선족 처소 교회를 순회하는 사역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교회를 짓기 위해서 92년도에 다시 들어가서 돌아오는 길에 중국 단동에 들렸습니다. 그것이 북한선교를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때가 92년 10월 10일. 이른 아침에 압록강 강변에 나가서, 건너편 신의주를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이었는데, ‘하나님 붉은 해가 떠올라 어둠의 땅을 밝혀 주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해가 떠올라서 북한의 주민들을 비춰주소서’라고 기도했어요. 그냥 구경하러 갔다가, 하얼빈교회에 조선족 교회 짓는 일을 위해 갔다가, 그곳을 보고 그런 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그 기도가 북한 선교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그 분이 피난 오시기 전, 신의주의 제일교회 목사님이셨어요.저는 (북한이) 공산화되기 전에 영락교회 청년부에 있었고요.
당시 한경직 목사님께 보고를 드렸어요.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 건너편의 신의주 지역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1933년에 단동 제2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옛날에는 신의주하고 단동하고 같은 노회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 제 2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보린원이라는 고아원을 하셨는데 남쪽에 피난 올 때 꼭 데리고 오고 싶으셨던, 김복순이라는 다리 하나가 없는 고아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강 목사가 단동에 다시 가서 ‘김복순’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보고 있으면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영락교회 집사님과 (압록강 단동 지역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한 목사님이 이 부탁을 하실 때 연세가 90세가 넘으셨었는데, 저희 옆에 앉아 계시던 큰 따님이 ‘우리 아버님은 그 분(김복순) 얘기만 나오면 울먹거린다’며 ‘지금 살아 계시다면, 연세가 60쯤 됐을 걸요’라고 하셨습니다.

김복순을 찾아달라고 하셔서 찾으러 갔어요. 단동에 도착해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식당 아주머니의 남편(박 사장)이 신의주를 왔다 갔다하면서 무역을 하고 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 남편분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죠.

제가 ‘가능하겠습니까?’ 묻자, 그 분이 ‘어렵지 않겠습니다. 무역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찾아보라고 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박 사장님도 교회 다니세요’라고 말하며 그분을 전도하기 위해 성경책을 건내 줬습니다. 그리고 ‘데리고 올 수 없지만 사진이라도 찍어 오세요. 한경직 목사님이 찾고 계신 그 분이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한 목사님이 만족하실 겁니다’라며 부탁했습니다.
그 양반이 신의주의 무역을 하는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에 한 목사님이라고 훌륭한 분이 계신데 김복순이라는 분을 찾고 계신다.’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먼저,‘해방전에 예배당을 다녔던 분들이 있는지’ 찾아 다녔고 해방전, 한경직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실 때, 신의주 제일 교회에 중등부 교사였던 할아버지를 찾아냈어요.

공산화 50년에도, 나무 궤짝 안에 교회 인쇄물 보관  

신의주 무역회사를 다니는 북한 사람의 도움으로 밤에 몰래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할아버지 집에 도착해, 낯선 남자 둘이 와서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리니 할아버지가 잔뜩 긴장해서, ‘무슨 일 때문에 왔습니까’하고 물으셨어요. 그러자 박 사장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박 사장이, 제가 전도하면서 준 조그만 성경책을 꺼내며 ‘할아버지. 저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자, 할아버지가 마음의 경계를 풀고 박 사장을 신뢰하게 되면서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면서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할아버지 방에 나무 궤짝이 있었는데 그것을 열더니 보따리를 꺼내셨습니다. 그 안에는 해방전에 신의주 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 교회의 주보와 교회에 관련된 인쇄물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발각되면 큰일 나는데, 공산화가 되어서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지하교회 교인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북한의 그루터기 신앙인, 침묵으로 주일 성수 

그 할아버지가 중요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주일 날이면 우리가 다녔던 예배당을 돌면서 침묵으로 주일 성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두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해방이 되자 바로 공산화가 되자 자유를 빼앗긴 교회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남쪽으로 내려간 교회가 다시 이곳에 교회를 재건할 계획이 있는 지. 앞으로 통일이 되면 신의주에 교회를 재건할 계획이 있는 지 알려 달라’고.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계시다면 90이 넘었는데 증거를 갖고 요세요. 교회 재건 계획과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갖고 오십시오.’

그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어서 한경직 목사님께 갖다 드리며 이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50년 동안 지하교회에서 신앙을 지킨 지하교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공산화를 해서 크리스천이 모두 없어졌고, 지하교인이 있을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가능성을 배제했어요. 그런데 ‘김복순을 찾아달라’는 목사님의 부탁에 지하교인의 존재가 밝혀졌어요. 그분은 ‘통일이 되면 무너져 버린 교회를 남쪽에 내려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서 남은 자들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는 꿈’을 갖고 계셨죠. 이 분뿐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에 의해서 그 땅에 남은 사람들, 그루터기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는 이사야 6장 13절 말씀처럼 예배당을 다 없애버렸는데도 그들의 신앙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복음 통일 세미나를 통해 느낀 점을 나눠주세요.

왜 금년에 이것을 기획했냐면, 금년이 3.1 만세운동 100주년이고 국가적인 행사들을 많이 합니다. 3.1절 당시 있던 것들을 발굴하면 계속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동경 유학생 11명 대표가 작성한 독립 선언문을 여대생 2명이 한국에 갖고 들어와서, 그것이 3.1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에는 20만명도 한국 기독교 인구가 안됐지만 나라를 찾고자 하는 자주 독립의 선지자 의식이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민족을 각성시키는 선지자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분단한 지 70년이 지났는데 당시 크리스천들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자들이었듯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한국 교회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자’, ‘믿음의 선지자들이 했던 것을 본받아서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취지에서 이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박 목사님과는 몇년 전부터 알던 사이였고 저를 여러 강사 중의 한 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지하교회의 사례와 그들의 신앙’ 그리고 ‘지하교회의 교회사적인 역사의식과 지하교회가 통일을 여는 데 어떤 사명이 있는지’ 그 두 가지 강좌를 맡았습니다.

-지하교회는 어떤 상황인가요?

지하교회를 15년 전만 해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가 많아지고 한국 선교사들이 국경지대를 통해 사역을 하면서 지하교회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계속 하게 하셨는데.. 나이 많은 사람뿐 아니라, 30대 (지하교인) 청년도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자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였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고 성경을 구했냐?’고 물어 봤더니, 밀수꾼을 통해서 성경이 신의주로 들어오고, 깜깜한 밤에 어떻게든 성경을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니 압록강과 두만강 지대에서 그런 방법으로 성경이 들어가고, 호기심으로 성경을 보다가 진리를 발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 뿐 아니라 친구들도 돌려 보고, 관계된 책도 보게 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던 거죠. 그들은 일반 노래에, ‘장군님’ , ‘수령님’ 대신 ‘예수님’을 넣어서 부르고 있었습니다.

통제된 세상 속 사람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가져  

통제된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까 낯선,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신기해 합니다. 사람이라는 게 자꾸 금하면 호기심을 갖게 돼요. 해방 이후에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고 자기들끼리 그룹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1세대 지하교인들 뿐 아니라 1960년 이후에 태어나 자생적으로 크리스천이 된 2세대 지하교인들도 있습니다.

또, 한 경우는, 국경지대의 조선족들 즉, 심양, 하얼빈의 조선족들 가운데 친척이 이북에 혹은 이남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친지 방문이 가능하죠. 북한 주민이 중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하러 왔다가 친척을 통해서 전도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이 먹고 자면서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성경 공부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받는 사람들 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게 왜 가능하게 됐냐면, 92년 10월에, 노태우 대통령 때 중국과 수교가 맺어져서 한국의 선교사, 실업인, 유학생들이 중국에 가게 되었잖아요. 자연스럽게 중국 조선족을을 알게 되고 큰 교회가 없는 작은 마을에는 처소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서탑교회와 동북신학교

수십만명의 조선속이 사는 동북삼성의 중심지인 심양에 있는 서탑교회(1913년 5월 봉천시에서 20여명의 신도로 시작하게 된 교회. 51년에서 80년까지 중국 공산당의 종교탄압과 종교말살정책에 의해 시련을 겪었으나 1980년 9월부터 교회를 떠났던 50여명의 신자들이 돌아오기 시작해 현재는 1,400명이 넘는 교세로 성장했다.출처: 크리스천투데이 박정규 칼럼 “조선인들의 정신적 위안소 심양서탑(西塔)교회”)에서 동북신학교를 만들었습니다다. 박형륭 목사가 신사참배가 극심해 지니 심양 만주의 동북신학교로 가서 가르쳤습니다. 그 지역 조선족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고 동북삼성에 가정교회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중국의 처소교회들이 상당히 부흥되었습니다. 또,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 선교단체를 통해서 장기 양육을 받고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면, 이들을 통해서 본토의 한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 중국 선교로도 확산되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대기근 통한 북한의 복음화

그러다 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94년에 김일성이 죽고 97년부터 북한의 어마어마한 기근사건, 일명 고난의 행군 때 북한에서 많이 넘어 왔습니다. 그 당시 3-4년 동안 300만명이 굶어죽었습니다. 많은 북한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러 압록강을 건넜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이 압록강 건너편의 조선족 처소교회였습니다. 그 배후는 한국의 선교사들과 미국의 한국 선교사들의 지원이 있었죠.

난민 사태가 96년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졌고, 저도 그때 탈북자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렇게 탈북민이 많아지면서 북한에 복음이 많이 들어가게 됐고 하나님께서 대기근을 통해서 북한이 복음화가 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대량 탈북사태, 중국의 강제 송환으로 이어져 

그런데 대량 탈북 사태가 국제적인 문제가 되니까 중국 정부가 탈북자를 체포하는 작전을 썼습니다. 국경지대에 불법 도강해 온 이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북한 당국에 넘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양육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돌아간 사람, 성경 매고 자발적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체포되어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이 가가호호 다니며 잡아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송환됐습니다.

압록강 두만강 접경 지대에 검문이 강화되니 이 사람들이 거기 있을 수 없게 되어 동북 삼성의 큰 도시로 도피를 하게 되었죠.중국이 계속 탈북자를 색출하고 강제 송환하기 위해서 공권력을 투입해서 탈북자가 거주하는 게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에 와서 자유를 만끽하니 돌아가기 싫어졌죠. 그래서 몽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을 거쳐 가 한국으로 오는 루트가 개척됐고, 2천년대 초부터 대량으로 많이 (한국으로)들어왔습니다.

탈북민, 남성에서 여성으로 

처음에는 남자들이 주로 왔는데 점차 여자들로 바뀌었어요. 여자들은 가정부, 식당일, 넘어 오기만 하면 일자리가 많으니 폭력배들이 취직시켜준다고 유인해서 농촌에 있는 중국인 노총각에게 팔아 넘기고 성매매 업소에 팔아 넘겨서 큰 이슈,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제재가 심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 노동 수용소에 보내고 북한에서는 체제의 위협으로 보고 공개 처형을 시킵니다. 지도자급은 공개처형을 할 때 ‘남조선의 선교사를 만났다’라는 죄목을 쓰는 게 아니라 ‘남조선과 연계되어서 첩보활동을 했다’는 죄목을 붙입니다. 그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거의 반세기 만에 복음이 확산된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 땅에 많은 피를 흘리게 됐습니다.

강석진 선교사는 1992년 압록강 건너편 중국 단동 지역에서 북한선교를 시작해 북.중 접경지대에서 탈북민과 북한 지하교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왔으며, 극동방송을 통해 대북 설교 방송과 통일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현재 ‘북방선교회’, 충주양의문교회’, ‘새하늘선교회’ 소속되어 선교 담당 목사로 섬기고 있다. 2015년 북한 실존 인물을 소설화 한 “오래된 소원: 반세기만에 평생 소원 이룬 북녘의 나오미 감동실화”를 펴낸 바 있다.

강 선교사는 스마트폰 앱 ‘nkmission.net’을 통해 더 많은 북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