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앞둔 가운데, 한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가 우려스럽다. 관광과 한류 등 민간 교류는 활발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악화일로에 있다. 잘 알려졌듯 3·1 독립선언서에는 자주독립 국가로서의 선언뿐 아니라, '동양의 영원한 평화' 실현이라는 웅대한 비전이 담겨 있다. 과거사 반성과 함께, 일본 선교를 위해서라도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설정이 절실한 때다. 이에 본지는 일본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19일 서울 양화진. 눈 덮인 풍경을 기대했건만, 오전 내내 내린 함박눈은 오후 늦게서야 나타난 햇살에 완전히 녹아 있었다. 겨울 잔디와 나무들은 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한적한 묘원에서 연신 셔터를 누르자, 이름 모를 새들이 반갑다는 듯 번거롭다는 듯 쉬지 않고 노래했다. 뭍과 물이 만나고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곳, 그 옛날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들이 잠든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그가 있다.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은 인물,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 그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된 유일한 일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소다 옹'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간, 그리고 1961년 '귀환' 후 1962년 소천할 때까지 한국에서 지내며 평생 고아들을 섬긴,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다.

'영원한 YMCA맨' 오리 전택부 선생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선교사들을 조명한 책 <양화진 선교사 열전(홍성사)>에서 소다 가이치 선생의 일대기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예수를 믿기까지, 한국에 오기까지

소다 가이치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현 소네무라스미다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오카야마 시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21세 때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했다. 나가사키로 가서 학자금 마련을 위해 광부로 일했고,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으로 갔다. 거기서 열심히 영어를 배웠다.

1896년 청일전쟁 후 일본 식민지가 된 대만으로 갔다. 독일 사람이 경영하는 어느 공장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하며 독일어를 공부했고, 잠시 중국 본토에 가서 해군에 종사하며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다 대만으로 돌아가 산악지대를 방랑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31세 때인 1899년 어느 날, 그는 한 거리를 방황하다 거리에서 너무 술에 취해 쓰러졌다. 완전히 의식을 잃고 거의 죽게 됐을 때, 이름 모를 한국인 한 명이 지나가다 그를 발견하고는 업고 여관으로 데려갔다. 이 한국인은 그를 치료하고 밥값도 대신 내줬다고 한다.

소다 가이치
▲일제강점기 황성YMCA(서울YMCA) 학관에서 일어 교사를 하며 이상재 선생 등 기독교 민족운동가들과 함께했던 소다 전도사(앞줄 왼쪽 세 번째). ⓒ영락보린원 제공

소다 가이치는 이를 잊지 않았다. 6년 뒤인 1905년 6월 '은인의 나라에서 은혜를 보답하리라' 결심하고 서울에 정착한다. 서울YMCA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빼앗기고, 기독교적으로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대한제국의 민족 지도자들은 기독교에서 활로를 찾고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풀려난 월남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고, 1906년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평생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을 다짐했다. 이상재와 함께 이승만, 김정식, 홍재기, 유성준, 윤치호, 김규식 등이 YMCA에 모여들던 때였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1908년 우에노 다끼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 때 일본 나가사키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 교사를 맡고 있었다.

30세 우에노와 결혼한 41세 소다는 새 사람이 됐다. 지독했던 음주벽을 완전히 청산했고, 금주회 회장까지 지냈다. 술 때문에 여러 차례 죽을 뻔 했던 그가 배우자와 신앙 때문에 달라진 것이다.

YMCA 종교부 총무이던 스승 이상재 선생은 '백만명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전도운동에 나섰고, 소다 가이치도 참여했다. 그러다 일본어 선생까지 그만두고 일본인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돼 복음을 전했다.

고아의 아버지, 하늘의 할아버지

소다 가이치는 일본인으로서 피지배국인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다 박해와 멸시, 오해를 숱하게 받아야 했다. 1911년 YMCA 조직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꾸민 '105인 사건' 때 이상재 선생 등 많은 지도자들이 죄 없이 투옥당하자, 동분서주하면서 석방운동을 벌였다. 대법원장 와타나베에게까지 찾아가 석방을 호소하면서, 일제의 불의와 만행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오히려 한국인들은 '간사한 놈', '일본의 스파이'라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더했다. 총독부 관리들은 그를 '배신자', '한국인의 앞잡이'로 몰았다. 양쪽에서 공격받는 처지가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후 1921년, 그는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장으로 공식 취임한다. 이 보육원은 1896년 사다케라는 일본인이 세운 곳으로, 1913년 고아원 출신 중 연장자를 한국으로 파송해 경성지부를 설치한 것이다. 해방 후 한경직 목사가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울 후암동 영락보린원의 전신이다.

소다 가이치
▲만년에 한국을 찾은 소다 가이치. ⓒ영락보린원 제공

한국 근대식 고아원의 시작이었던 그곳에, 5년 뒤인 1926년 부인 우에노 다끼도 교사를 퇴직하고 합류해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총독부로부터 과거 왕가 소유 대지 1천여평(3300㎡)과 소속 건물을 무상 대여받아 규모를 확장하고, 해방까지 1천여명의 고아들과 함께했다. 지금 영락보린원이 위치한 그곳이다.

소다 가이치 부부는 고아들을 돌보면서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버려진 갓난아기를 안고 유모를 찾아다니다 구박을 받기도 했고, 아기가 너무 울어 밤잠을 이루지 못한 날은 부지기수였다. '거지', '위장한 자선가' 등의 비방은 계속됐다.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는 고아들에게 항일 교육을 시켰다며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헌병대가 잡아들인 청년은 독립운동 지하조직 일원으로, 보육원 출신이었다. 소다 가이치는 보육원 출신의 고아가 독립을 위해 싸우다 잡힌 애국투사가 된 것이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헌병대에 용서를 구하면서 석방을 간청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한국의 '하늘 할아버지', 우에노 다끼 여사는 '하늘 할머니'로 불렸다.

한국인들만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체험했다. 경제난으로 보육원이 폐원 위기에 몰렸을 무렵, 정문에 편지와 함께 놓인 보따리 하나를 발견했다. '소다 선생 내외분이 하시는 일은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인 줄 압니다. 우리 동포를 대신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사정이 있어 국외로 망명합니다. 도둑놈은 아니니 안심하시고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써 주세요.' 옷가지와 시계, 그리고 1천원이 함께 들어 있었다. 소다 옹 부부는 감격의 기도를 드렸다.

"일-한 친선, 반드시 이뤄질 줄 믿는다"

소다 가이치는 원산감리교회에 교역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1943년 가을 77세의 나이에 무보수 전도사로 갔다. 부인은 서울에 남아 보육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해방 후, 원산에 들어온 소련군은 일본인 집을 다짜고짜 습격해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했다. 일본인들은 집을 버리고 교회로 몰려왔다. 소다 전도사는 교회 입구에서 그들을 지키고 섰고, 소련군은 그냥 돌아갔다.

1947년 5월, 소다 옹은 원산 내 일본인들이 마지막 철수하는 길에 서울로 함께 떠났다. 보육원 아이들과 부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곳에 머물지 않고 고국 일본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도, 패전국이 된 절망의 땅 일본으로 돌아간다.

떠나기 전, 소다 옹은 부인과 세 가지 서약을 했다. 첫째, 과거와 같이 하나님 은혜를 확신한다. 둘째, 어떠한 재난이 닥쳐도 십자가를 우러러보며 마음의 평화를 간직한다. 셋째, 하나님의 가호를 빌며 살다가 천국에서 만난다. 그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 미군 배를 얻어타고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했다.

영락보린원
▲현재 영락보린원 모습. 가마쿠라 보린원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영락보린원 제공

81세의 소다 옹은 그때부터 한 손에는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한 손에는 성경을 든 채 전국을 다니며 조국의 회개를 부르짖었다. 원자탄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비롯해, 최남단 규슈부터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다녔다. 당시 소다 옹은 한국 영주권을 소유하고도 일본에 돌아온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금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일-한 친선이 반드시 이뤄질 줄 믿는다. ... 경성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이 7-8백명이나 있다. 나는 이승만 씨와 만났을 때 재일 한국인 60만에 관하여 일본인들이 조금 더 올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장차 한국인들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

"오 하나님, 인류가 범한 이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전국을 순회하다, 그는 폐렴에 걸려 생사를 오갔고 도둑을 만나기도 했으며, 자동차에 치어 죽을 뻔 했다. 그러다 1950년 1월, 아내 우에노 다끼가 74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슬퍼하기는커녕, 약속대로 찬송과 감사로 하나님의 가호를 빌었다.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녀는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녀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녀는 이 늙은이 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해방 5년밖에 되지 않아 일본 배척의 기운이 강했지만, 장례는 당시 사회부 장관을 장례위원장으로 하여 한국사회사업연합회장으로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