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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길 칼럼] 오후 5시 실버들의 도전 (2)

기독일보 news@christianitydaily.com

입력 Feb 07, 2019 11:15 A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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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인생의 전반부 50년; 나를 위해 살다

정운길 선교사
정운길 선교사(미주 실버선교회 대표)

1.4 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오르다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은 홍천 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우리 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전투 장면이다. 치열한 교전 중에 사망한 군인들의 시체와 사방에 흩어진 철모와 소총을 비롯한 온갖 전쟁 무기들이 즐비했다. 나는 그런 처참한 광경에 몸서리치면서 남쪽으로 피난하기 위해 다시 정처 없는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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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피난보따리를 꾸려서 우마차와 사람들이 빽빽하게 넘어가는 피난민들과 함께 높고 좁은 삼마치 고개를 넘어서 횡성군 공근면에 다다랐다. 그러나 잠시라도 지친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는 헛간에서 잠시 눈을 붙여보았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사람들이 빼곡하게 찬 방에 비집고 들어가서 눕지도 못하고 그냥 앉아서 졸다가 자다가 하면서 동트기만 기다렸다. 지겨운 밤이 가고 이윽고 어렴풋이 길이 보이자 출발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틀 만에 원주 역에 도착했다.

가끔씩 기적소리를 내며 검은 석탄 연기를 뿜어내는 기차를 타려고 했으나 기차 지붕에까지 피난민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어 아무리 애를 써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기차를 포기하고 할 수 없이 걷고 또 걸어 문막을 지나 달래강에 이르렀다.
강은 전체가 얼어붙지 않았고 중간 중간에 물이 흐르는데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도 간간히 떠내려가고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이때 다행히 피난길을 홍천에서부터 함께 떠났던 이웃사촌인 박호창 씨 가족도 강을 건너려고 상류와 하류를 오르내리며 길을 찾고 있었다. 호창 씨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와도 오랜 세월 이웃에서 함께 지낸 친구이고 호창 씨는 큰형님 친구이며 호창씨 동생 덕창 씨는 나의 둘째형과 친구이고 그의 넷째 동생 해창이는 나의 친구이다. 그러니까 혈육만 다를 뿐 특별한 이웃사촌이었다.

가장을 여읜 어머니는 해창이네를 의지하고 한 가족처럼 피난길을 떠났기에 해창이 아버지가 두 가족을 이끄셨다.
그분이 앞장서서 건널 수 있겠다고 판단이 되는 얼음이 비교적 단단해 보이는 곳을 건너는데 강 아래쪽에서 건너던 소가 얼음이 꺼져 물에 빠져 죽고 사람들도 많이 얼음 속으로 들어가 빠져드는 안타까운 장면을 보면서 해창이네 여덟 가족과 우리 세 가족은 무사히 달래강을 건넜다.

하지만 비탈 눈 얼음길에서 해창이 어머니가 넘어지면서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부러진 팔에 나무로 부목을 하고는 계속 걸어가며 변변치 못한 치료를 해창이 아버지가 했다. 이제부터는 우리 어머니가 해창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밥을 지어 한 솥밥을 먹으며 가다가 저물면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한 아무 집에나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다시 걷고 걸어서 충청북도 청주에 도착했다.

청주 무심천 둑 옆에 있는 일신초등학교 강당에 임시로 설치한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가 한 평정도의 넓이를 백묵(白墨)으로 그은 선을 경계로 전혀 모르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피난민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해창이 어머니의 부목을 댄 부러진 팔이 조금 회복되어 약간의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두 집의 식사와 빨래 등 힘든 일을 도맡아서 하시면서도 단 한 번도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병들어 죽게 된 형을 피난민 수용소에서 만나다.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을 그곳에서 맞았다. 향토방위병으로 끌려가서 전쟁을 치르던 큰형은 휴전이 되자 충북 증평에서 가족을 찾아오다 먹지 못하고 병까지 든 몸으로 길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피골이 상접하고 누렇게 뜬 얼굴로 가족을 찾아서 강원도 피난민들이 있다는 수용소들을 수소문하며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우리가 수용되어 있는 청주 석교국민학교 강당까지 찾아와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당시 피난길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볼 형편들이 못 되었다. 저마다 자신의 생존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형의 입장에서도 병으로 일도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처지도 못되었다. 다른 사람이 조금만 도와줬어도 기력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하루 한 끼조차도 얻어먹을 수가 없어 바짝 마른 형이 수용소를 전전하며 가족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든 맏아들이 오자 어머니는 어디서 구했는지 약병아리를 사가지고 와서 몸에 좋다는 한약을 넣고 달여서 먹이셨다. 옆에서 보고 있던 우리는 그야말로 국물도 못 얻어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창 나이의 큰형은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회복되어 걷지도 못하고 비실대던 형이 힘을 되찾았다. 예전의 모습을 회복한 형은 어머니 일을 돕기 시작했다. 큰형은 나무를 해다가 팔면 돈이 된다면서 둘째형과 나를 데리고 산으로 갔다. 하루는 큰 형이 다섯 살 아래 둘째 형과 여덟 살 아래 나를 데리고 청주에서 동쪽으로 20리가 넘는 곳까지 걸어가서 높은 산 중턱의 나무를 베어 멜빵을 걸어 동생들의 등에 지키고 수용소로 돌아왔다. 그 후부터는 매일 같이 그 산에 가서 등걸나무를 베어 적당히 쪼개어 팔아 생활에 다소라도 보탬을 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열 살짜리 어린것이 형들과 함께 매일 20리가 넘는 먼 길을 다 떨어진 신을 신고 어떻게 따라다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게다가 물먹은 생나무가 멜빵을 내리누르고 나무의 뾰족한 고쟁이가 등을 찌르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멜빵이 좁아 검푸르게 피멍이 든 어깨의 통증을 참으면서 내 집도 아닌 피난민 수용소로 한 발짝 한 발짝씩 떼며 걸어갔던 것이다.
그 힘든 노동 중에도 큰형님은 이름을 아는 산나물도 뜯어 보자기에 싸서 나무를 가득 실은 지게 위에 올려놓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어린 나도 덩달아 형들을 따라 흥얼거렸다. 지금은 그 어려웠던 시절의 고생이 오히려 그리울 뿐이니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피난지 청주에서 처음 주일학교에 다니다

피난생활 중에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청주의 어느 교회 신자들이었다. 청주 석교초등학교 강당에서 피난민 생활을 할 때 피난민들에게 가까운 언덕위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여러 차례 전도 쪽지를 나눠주었다. 마침 교회 부흥회가 있으니 와서 보라고 친절하게 권유하고 있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어머니는 소학교 시절에 부르던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 찬송가 가사를 지은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교장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찬송가였던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에게는 타고난 신앙심이 있으셨기 때문인지 저녁 부흥회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난생 처음으로 교회 문턱을 밟았다. 그 후부터는 피난민수용소에 있는 내 또래 아이들과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도 드리고 미국에서 온 구호물자도 받고 신앙이 뭔지도 모르면서 몇 달간 빠지지 않고 어린이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내가 피난민 수용소에 퍼진 그 무서운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그 무서운 염병(染病)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장티부스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먼 증평까지 집집을 돌아다니시며 머리에 물건을 이고 파는 도붓장사를 하면서 우리 삼형제를 키우셨다. 내가 수용소에서 염병이 걸리니까 피난민 수용소에 더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는 청주 반(밤?)고개라는 곳에 방 한 칸을 세를 내어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얼마 동안을 살면서 워낙 써서 먹기도 어려운 금개랍(지금 생각하면 키니네 같은 약)이라는 노란 알약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계속 먹으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리가 뒤틀리며 바짝 말라 피골이 상접한 자신을 보면서 투병하여 그 무서운 염병과 싸웠다. 어느 정도 치료가 되고 홍천이 수복이 되자 피난민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사람들과 함께 홍천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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