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Photo : )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1919년 3.1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넷째 원인은 일제가 교회를 조직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일병탄이 공포된 때로부터 3·1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10년간 교회가 얼마나 위축되었는가는 1910년 신입교인 수가 2천명이 넘었는데,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400명도 안된 사실에서 엿 볼 수 있다.

 1915년에 발표된 ‘포교규칙(布敎規則)’에, 모든 성직자들은 총독부로부터 자격증을 받아야 하며, 교회나 종교 집회소를 신설 또는 변경할 때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한 허가제도로 일체의 교회활동을 철저히 제약하려는 일제의 정책에 대해 평양에서 사역하던 감리교 의료 선교사 홀(S.Hall,M.D.)은 한국이 ‘Hermit Kingdom’(은둔의 왕국)에서 ‘Permit Kingdom’(허가의 왕국)으로 전락했다고 개탄하였다. 경찰은 모든 예배를 감시하고 설교의 내용을 검열했으며, 신자들이 모이는 정기예배 외에도 기도회, 사경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감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설교의 내용 중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나, 여호수아와 갈렙, 혹은 기드온의 300용사 등의 기사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이야기라며, 이는 약한 한국이 강한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암시적 내용이므로 거론해서는 안 된다며 억지를 부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황숭배와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 교회가 항일 대열에 서게 하는 직접적 동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일본인도 3·1 독립운동의 첫째 원인이 총독부의 신앙 탄압이라고 솔직히 고백한 일이 있었다. 기독교 학교에 대한 탄압은 1915년에 발표된 ‘개정사립학교법’에 따라 학교 수업 중 성경교육과 예배를 금지시키고, 반드시 일본어만 사용토록 하여 언어까지 말살하려는 작태를 서슴지 않았음에서 볼 수 있다.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계 학교의 탄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억압 속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교파간의 연합사업을 착실하게 진척시켰다. 1915년에 장·감이 연합하여 「기독신보」를 창간하였고, 1918년에는 서울 YMCA에서 장·감의 대표자들이 모여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회’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에 대한 탄압은 그 도가 점점 심해졌다. 그들이 행한 한국 탄압에 대해 1920년 그리스볼드(H.D.Grieswold)는 다음 같이 기록하였다. “……극심한 무단정치, 비국민화, 정치에 있어서 철저한 한국인의 참여 배제, 한국인에 대한 차별 정책,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불허, 제한적인 종교적인 자유, 한국어 공부의 실제적인 금지와 해외여행 제한, 왕실 토지의 징발, 공창과 아편의 보급으로 인한 국민들의 비도덕화, 만주로의 강제 이주, 산업과 상업에 있어서 일본인들에 대한 우선 정책 등”이다.

일제의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이에 저항하는 민족의 내부적 불만은 쌓여 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힘이 없고 때가 성숙하지 못해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벌인 항일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국적, 조직적 항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이 민족적 거사가 활화산처럼 분출되어 나왔다. 1908년 헐버트는 선지자처럼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는 말하기를 “……때가 올 것이다. 기독교가 끼친 문명의 영향이 일제의 탐욕과 억압을 쳐부수어 버릴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일제는 [한국의] 사회 구석구석을 부패하게 만들었다.……기독교는 정의, 청결, 친절, 공익의 정신, 애국심, 협조, 그리고 교육을 위하여 분연히 투쟁할 것이다.” 일제의 억압을 참고 견디던 우리 민족과 교회가 때가 되어 일어난 것이 바로 3·1 독립운동이었다.

3·1 독립운동의 직접적 동기가 된 것은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기 전 해인 1917년 미국의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였다. 그 핵심 내용은 약소국들이 강대국들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며,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자결주의 원칙이었다. 비록 이 원칙이 제1차 대전에서 패전한 국가들의 식민지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 살던 한국인에게는 하나의 희망적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 동기 중 또 다른 하나는 그 해 정월 22일에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崩御)하자, 그의 사인(死因)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국상을 당하여 일제가 일반인들의 문상을 위해 1주간을 자유롭게 여행하도록 허락하자, 민족 지도자들은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측하고 이 기회에 시위를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 동안 쌓인 분노가 독립 쟁취를 위한 행동으로 표출될 때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던 중에 고종의 급서(急逝)는 붙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로 이어져 드디어 3월 3일 인산일(因山日) 이틀 전인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터졌다. 사실은 인산일 하루 전이 2일에 운동은 일으키자는 천도교 측의 주장을, 그 날이 주일이므로 기독교에서는 동조 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하루 더 일찍, 1일 토요일에 운동이 터진 것이다. 조상들의 주일 성수의 정신이 엿 보이는 대목이다. 이 3·1 독립운동은 ‘자유를 사랑하는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자발적인 운동’이었다고 브라운(G.T.Brown) 선교사는 설파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자,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판단하고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 였다. 그리고 1918년 4월 파리에서 모이는 만국평화회담에 우리 대표단을 파송하여 민족의 독립을 청원할 길을 모색하였다. 또한 그 해 여름 중국 상해에서는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이 중심 되어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대표였던 여운형은 국내에 있는 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1918년 9월, 선천에서 열리는 노회에 출석한다는 명목으로 입국하여 이승훈, 이상재 등을 만나 외국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리고 국내에서 할 일들을 의논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