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분북사'(분단 이후 북녘 교회사) 연구가 이렇게 황무지 상태인 이유는 ①교회의 전통적인 반공정서 ②분단 이후 북한에는 교회가 존속하지 못했고, 따라서 교회의 역사도 없었다는 피상적 통념 ③현장 접근 불가능 ④자료 찾기가 지난(至難)하다는 사실 등 여럿이다.

한국교회에서 분북사 연구를 개척하고 지금도 그 일에 외롭게 힘쓰고 있는 분이 있다. 김흥수(金興洙) 박사(목원대 명예교수)이다. 이분이 1992년에 펴낸 '해방후 북한교회사: 연구∙증언∙자료'는 한국교회 분북사 연구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작년 말에 이분이 한 통일선교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금 우리나라에는 북한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저와 또 한 분, 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60대 후반이고, 나머지 한 분은 70대 중반입니다. 위기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현장에서 들었는데, 그 목소리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북사 연구가 빈약하다는 것은 통일선교의 기초가 허약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분북사의 대강

이제 1945년 이후 2018년까지의 분북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장대현교회
▲과거 장대현교회 예배 모습(위)과 장대현교회 재건교회 전경(아래)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①재건과 부흥(1945~ )
해방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에는 재건운동이 일어났는데 재건운동은 평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지도자들이 대부분 평양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되었는데, 이분들('출옥성도'라 부른다)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양에 머물러 재건원칙을 발표하고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어서 재건운동은 뜻한 대로 되지 않았다. 분단 이후 북녘에서는 일시적인 부흥현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부흥현상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공산정권의 탄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②탐색과 충돌(1945년~1946년)
공산정권은 처음에는 교회와 손을 잡기 위한 탐색작업을 했다. 북녘에서 교회의 세력이 워낙 강성했고, 공산정권의 기본정책이 '통일전선'이었기 때문이었다. 통일전선은 알기 쉽게 말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합하는 것을 말하는데, 북한은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가 종교문제를 담당하고 있다.(중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탐색은 오래가지 않고 곳곳에서 충돌이 빚어졌다. 기독교사회민주당(윤하영 목사와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에서 조직) 용암포지부 결성대회 방해사건, 3∙1운동 기념예배 방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국사편찬회의에서 펴낸 '북한관계사료집'에는 당시 북한 보안관계기관들의 회의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북녘교회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이 잘 예고되어 있다.

③탄압 본격화(1946년)
공산정권은 소련권정의 지시에 따라 첫 선거를 1946년 11월 3일에 실시하였다. 이날은 주일이었는데 북녘교회들은 '주일에는 예배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맞섰다. 이 일을 계기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김일성은 바로 자기편을 들어줄 교회조직인 북조선기독교도연맹(현재의 이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만들었다. 해방을 맞이하여 문을 열었던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새로 만들어진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는 강제 축소합병 되었다가 폐교당했고, 체포되고, 행방불명되는 지도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김일성 부자의 대형 동상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에 김일성 부자의 대형 동상이 들어섰다. ⓒ크리스천투데이DB

④전통교회, 지상에서 사라지다(1950년 이후)
공산정권은 1950년에 6∙25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참전으로 전쟁을 일으킨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공산정권은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극대화시키면서 교회를 미국과 동일시해서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6∙25전쟁 초기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신석구(申錫九)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희생당했다.

 

교역자들이 다수 월남하여 지도력 부재 상태가 되었고, 교회당을 비롯하여 여러 시설이 거반 파괴되었다. 교회당 파괴 문제에 대해 공산정권은 '미제의 폭격으로 하나도 남지 않고 깡그리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고, 남녘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 우연한 계기에 이 문제를 집중 추적하게 되었는데, 그때 많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지만 다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도 전쟁 후 상당 기간 그대로 서 있었다.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세워졌고, 2012년 4월에는 김일성 부자의 대형 태양상(모자이크 벽화)이 건립되었다.

이어서 중앙당집중지도, 주민재분류 등록 등 여러 이유로 전통교회는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여기에서 '전통교회'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회'를 말한다. 이때를 암흑기, 진공기, 완전말살기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⑤재출현(1972년~현재)
1970년대 초반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외교포 교역자들의 북녘 방문이 이어지고 조금씩 달라지더니 1972년 후반에 평양신학원이 문을 열었다. 이어서 성경과 찬송가가 발행되고 1988년에는 봉수교회가, 두어 해 뒤에는 칠골교회가 문을 열었다. 필자는 이 교회들을 '국가교회'라고 부르고 있다. '국가가 필요하여 건립하여 관리하는 교회'라는 뜻이다. 북녘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을 비롯하여 각 종교단체들이 있고, 조선종교인협의회도 있는데 이 단체들은 모두 조선로동당 통일 전선부의 외곽기구들이다.

조그련의 활동도 활발해져서 국가정책을 옹호하는 각종 성명서를 종종 발표하고 WCC와 접촉하고, 각종 국제회의에도 참석하고 있다. 통일 문제를 중심에 두고 남측의 교회와도 만남을 갖고 있다. 지금 북녘교회는 이 같은 재출현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북한교회사'에서는 이것을 '사회주의화 된 기독교의 점진적 활성화' 또는 '사회주의형 기독교의 발전'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재출현'이라고 하는데 '위장전시' '역이용' 등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분들이 많다.<계속>-전방개척선교 2019년 1∙2월호-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성화감리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