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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선 목사, ‘민족 복음화’라는 용어 처음 들고 나오신 분”

기독일보 이대웅 기자

입력 Dec 20, 2018 06:47 A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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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최복규 목사, ‘회개·기도’ 등 고인의 영성 주제로 대담

김명혁 목사와 최복규 목사(왼쪽부터)가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김명혁 목사와 최복규 목사(왼쪽부터)가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매달 교계 지도자들과 대담을 통해 신앙의 선배들을 추모하고 있는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명예회장)가 12월에는 최복규 목사(한국중앙교회 원로)와 함께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 목사를 기렸다.

20일 오전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김명혁·최복규 목사는 '김치선 목사님의 회개와 은혜사모와 기도와 전도의 영성을 염원하며'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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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성령의 사람,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던 김치선 목사
정오만 되면 일어서서 눈물로 기도하던 '한국의 예레미야' 

먼저 김치선 목사로부터 2년간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최복규 목사는 그의 생애를 간략히 요약했다. 그는 "김치선 목사님은 1899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원래 어선을 소유한 어부 집안이었지만, 태풍으로 가세가 기울어 화전민으로 전락했다"며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15리나 되는 교회 새벽기도를 매일 출석했다"고 전했다.

최복규 목사는 "어린 나이에 캐나다 영재형 선교사님(L. L. Young) 댁에서 심부름을 하며 성장했다"며 "당시 영생중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영 선교사님을 죽이려고 불량배들이 새벽 4시에 선교사님을 교장실에 가두고 불을 질렀는데, '불이야' 소리에 새벽기도 중이던 '김치선 군'이 달려가 문을 부수고 실신해 쓰러져 있는 영 선교사님을 구출한 일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최 목사는 "이제까지는 영 선교사가 김치선 군을 돌봤는데, 이제는 김치선 군이 영 선교사에게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라며 "이후 영 선교사는 친자식처럼 김치선 군을 살피고 그의 부모형제와 대가족까지 돌봐주셨다. 영 선교사는 유언을 통해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한국에서 내가 한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 김치선을 얻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치선 군은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해 목회자 못지 않게 교회 일에 충성하다, 영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과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한국 최초의 구약학 박사'가 돼 일본으로 돌아온다. 일본에서 고베중앙교회를 개척해 크게 부흥시킨 뒤, 1939년 동경으로 떠나 고베중앙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최복규
▲최복규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최복규 목사는 "당시 일본에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팽배했는데, 이를 걱정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성령운동의 불길이 타올라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며 "그러나 1940년 '대동아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 경찰의 박해가 심해졌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도 심해져 체포·구금되기도 했다"고 했다.

최 목사는 "김 목사님은 1944년 3월 귀국해 대구에서 목회하다, 남대문교회 6대 목사로 초빙되셨다. 해방 후 3천만 민족의 십일조이 3백만 구령운동을 전개하고, 김구 선생 댁을 매주 심방하는 등 민족운동에도 성심을 쏟았다"며 "인재 양성을 위해 1948년 남대문교회 내에 야간신학교를 개설했다. 교훈은 '주님께 충성, 타인에게 겸손, 자신에게 진실'이었다"고 전했다.

또 "성품과 영성은 한 마디로 믿음과 성령의 사람, 매사에 열정적인 분이셨다. 기도의 열정이 넘쳐서, 12시 정오만 되면 밥을 먹다가도, 아니면 강의를 하다가도 일어서서 눈물로 기도하셨다"며 "그래서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리셨다. '2만 8천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외침으로 개척을 독려하셨던 목회자요 신학자요 전도자요 부흥사이셨다"고 강조했다.

매일 새벽 찬송 부르고 눈물 흘리며 회개 기도드리던 모습
"김 목사님 말씀 듣지 않으면 영혼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어 김명혁 목사는 "중학생 시절 피난지였던 대구에서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은혜사모와 성결과 재림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된 것은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너무 큰 은혜와 축복이었다"며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서울에서는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은혜사모와 기도와 전도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된 것은 또 하나의 큰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목사는 "저는 김 목사님이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는데, 매일 새벽 찬송을 부르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다"며 "늘 회개를 강조하시면서 설교 시간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했고, 가정을 다스리는 파수꾼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죄를 회개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도 회개했다. 신사참배 경력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다. 너무너무 귀중한 회개의 고백"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는 김 목사님을 너무 존경하며 사랑했고, 그 사랑과 은혜와 가르침을 너무 많이 받아 김치선 목사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하려 했다"며 "김 목사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혼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김 목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의 기도와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가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김명혁
▲김명혁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김명혁 목사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교복을 입고 열심히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이기 시작했고, 천막을 구해 교회를 시작했다"며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였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시작한 초라한 개척교회였지만, 한 젊은 엄마 교인이 '우리 한양 제일교회가 제일 좋아요'라고 했다. 이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랑과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눈물의 회개와 은혜사모와 기도와 전도의 목사님을 신앙의 스승님으로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며 "제게 사모하는 마음과 듣는 귀와 순종할 수 있는 몸과 삶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때 저와 같이 사역하던 안흥규 학생은 나중에 강변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할 때 함께 사역했고, 초대 장로와 건축위원장을 맡았다"고 전했다.

그는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이라는 책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평가를 전하기도 했다. "김치선 박사는 한국 교회와 사회가 사는 길은 오직 십자가 복음뿐이라 생각하고,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와 역사 의식이 분명한 그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며 세상을 거룩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대한신학교 학생들에게 영농법과 침술법도 철저히 가르쳐 백성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고자 했다. '민족 복음화'란 용어를 처음 들고 나온 사람이 바로 김치선 박사였다."

아울러 "새로운 회개와 기도와 복음 전파의 운동이 가난과 청빈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길 소원하고 기도한다"며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김치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같은 귀중한 하나님의 종들을 다시 우리에게 보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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