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림 목사
평안교회 강성림 목사

"친구"라는 단어가 요즘 처럼 가볍게 사용되는 때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카톡이며 Facebook과 같은 SNS에서 그냥 친구들이 난무합니다. 실제로 얼굴을 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어도 가볍게 친구를 맺습니다. 지난 토요일 막내 아이의 친구가 생일이라고 아침부터 선물 준비하고 포장하고 다른 친구들과 무슨 Event를 준비하는지 저희 집에 와서는 정말 시끄럽게 깔깔거리는데 저런게 실제 친구다 싶었습니다. 카톡, Facebook에서 그냥 "생일 축하해"라는 한마디와 이모티콘 정도를 전하는 친구와는 다릅니다. 마치 카톡과 Facebook에서는 친구는 있는데 우정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진정한 친구와 카톡도 하고 Facebook도 하지만, 카톡이나 Facebook만으로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는 없다 싶습니다. 

 인생에 진실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내 리무진에 함께 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는 리무진이 고장 났을 때 나랑 함께 버스를 타줄 친구를 원한다" 라는 말로 친구란 누구인가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움을 당했을 함께 어려움을 같이해 주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보면 친구들 중에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친구이면서도 정죄하는 친구들입니다. (욥32:4) 우리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언제 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지 압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바른 소리를 하는 친구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마음을 같이 하는 친구가 진실한 친구입니다.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친구를 가진 사람이 다윗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고 쫓길 때에 다윗의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다윗의 친구 유다 장로들(삼상30:26)은 다윗의 어려운 광야 시절에 서로 돕던 친구들입니다. 다윗의 친구 후새 (삼하15:37)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간 다윗을 위하여 압살롬 곁에서 다윗을 지켜줍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에 가장 어려울 때에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귀한 친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입니다. (단2:17-18) 다니엘은 어려울 때에 함께 기도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친구들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안동의 유서 양반 집안 후손들은 아직도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던 허교(許交)라는 절차를 거처 친구를 삼는다고 합니다. 허교(許交)란 "사귐을 허락하다"라는 말입니다. 만나자마자 바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그 사람을 알아보고 겪은 다음에 본격적인 친구가 되려고 할 때 하는 절차라고 합니다. 마치 요즘 이성들이 만남 가지면서 썸을 타다가 "우리 오늘부터 1일 이야" 하면서 연인이 되듯이 친구로써의 시작을 "허교"라는 말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썸과 연인이 다르듯이 그냥 아는 사람과 친구는 분명히 다릅니다. 

감사한 일은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허교(許交) 한다", "친구 하자" (요15:12-15) 하십니다. 더군다나 나 같은 죄인의 친구라 불리셔도 (눅7:34)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개의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정죄하지 않는 친구이십니다. (요8:11) 예수님은 죄인 친구인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 친구 되십니다. (요15: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의 벗 아브라함" (사41:8, 약2:23)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자신을 팔고 있는 가룟 유다를 향해서도 "친구여" (마26:50)라 부르시며 끝까지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배신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친구여"를 부르시는 예수님이시기에 나 같은 죄인에게도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 진정한 친구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찬송가 영어 가사가 은혜로 다가 옵니다.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and bear"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