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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목사의 한국교회사] 한국 교회와 3·1 독립운동 (I)

기독일보 news@christianitydaily.com

입력 Dec 04, 2018 10:12 A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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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탄한 것이 1910년, 그러니까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약 10년간의 한국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초대 총독으로 한국에 온 사내정의(寺內正毅)는 한국에 와서 그 시정 운영을 군정으로 시작하였다. 보병 2개 사단, 약 4만 명의 헌병과 경찰 그리고 약 2만 명의 헌병보조원이 전국에 배치되어 국민들을 감찰, 억압했다. 일반 관리는 물론 심지어 남자학교 교사들까지 군인과 같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찼다. 그 칼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교실에 들어오는 교사들의 칼 찬 모습에서 경찰이나 헌병을 연상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군국주의적, 권위주의적 행정을 폈다. 따라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그 때부터 해방이 되어 물러갈 때까지 한 번도 문관이 총독으로 임명된 일은 없었다. 한국을 병탄한 후 일제의 대한(對韓) 정책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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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동화(同化) 정책과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다. 동화 정책이란 한국이라는 개념을 없애고 한국을 완전히 일본에 예속시키고 동화시키는 정책을 말한다. 이런 동화 정책은 일제의 치밀한 한국의 영구 식민화를 획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심지어 일본의 기독교인까지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생김새의 유사성을 말하면서 조선인의 동화는 큰 희망이라고 말 할 정도였다.

저들은 이미 병탄 이전인 1909년 8월에 각 급 학교의 교과서 검열을 위한 지침을 계획하였고, 1910년 병탄 후에는 한국인의 신문, 잡지, 학술지을 금지하여 충의록(忠義錄), 무용전(武勇傳), 위인전(偉人傳), 역사서(歷史書) 등 51종 20만 권을 모아 불태웠다. 1911년에 발표된 교육령의 목적은 “한국인들을 일본 천황의 충직한 국민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국인의 고유한 역사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그 역사와 정통성을 부인하며 모든 역사서를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울러 저들은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말살하기 위해 조상이 어떻게 조국을 위해 분투했으며, 어떻게 순국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노래, 민요 등을 얘기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또한 각 급 학교에서 역사와 언어 교육을 제한하였고 민족적 자긍심이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어떤 문학작품도 철저히 색출하여 회수해 갔다. 반면에 일본사(日本史)와 일본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한국인 스스로를 열등민족으로 비하(卑下)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한국인을 우민화(愚民化)시키기 위해 일제의 정책에 순순히 맹종 시키려는 정책을 수립하여 하급관리, 사무원, 근로자 양성을 위한 교육제도를 실시하였다. 1911년 8월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제국에 충량(忠良)한 국민으로 교육 하는 것이다. 2. 일본어를 보급한다. 3.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고, 필요하면 실업 기능의 교육만 실시한다.”

이는 한국인을 철저히 일본인과 차별하여 2등 국민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말로만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하며 동화되는 국민을 만든다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웠을 뿐이다.

   둘째,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해 왔지만 자치권을 확보해 주었다. 특히 경제적인 침탈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달랐다. 특히 경제적인 면의 다른 점을 스와인(D.A.Swai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뒤 등록되지 않은 모든 토지는 국유화시켜 버렸고 … 일본인들의 토지회사와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매각해 버렸다.

1909년부터 1915년까지 일본인들 토지 소유는 10배에 달하였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한국인 소유의 4배에 달하였다. 더욱이 1910년에서 1920년까지 토지에 대한 세금은 2배나 증가하였다. 동일한 기간에 순수한 한국의 자본은 17%에서 12%로 줄었으나, 일본인들의 자본은 32%에서 80%로 늘어났다. 이 수치는 [일제가]한국의 산업을 얼마나 억압했나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한 후 토지 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 조사령(1912년)을 내려 8년 동안 약 2천만 원의 경비를 들여 토지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구 왕실 소유의 토지를 비롯하여 종교 사원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총독부가 소유한 토지 면적이 888만 정보, 동양척식은 11만 정보였고, 여기에서 받아들인 연간 소작료만도 50만 석에 달하였다.

   또한 농민들에게 자기들이 소유한 모든 농지를 등기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농민들에게 이런 사실이 잘 홍보되지도 않았고, 등기 하려 해도 그 수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한국인들 중에서 정부 시책에 비협조적 분위기가 많았던 농민들에게 등기수속을 제때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주인이 엄연히 있는데도 등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토지를 총독부가 강제로 압수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경제적 억압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토지와 삶의 터전을 잃고 외지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 50만 명이 일본으로, 200만 명이 만주나 시베리아, 하와이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농토 외에도 광업, 임업자원과 어업에까지도 수탈을 자행하였다. 1905년 독도(獨島)를 불법으로 일본에 편입시킨 것도 수산자원을 침탈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퇴폐문화의 유입 정책이었다. 일제는 일본의 창녀들을 대거 한국에 이주시켜 한국 청년들을 부패시키기 위해 공창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철저히 규제하고 금지하는 아편을 재배하게 하였다. 또 그것을 판매하여 우리 민족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시키는 야만적 정책을 채택하였다. 또한 술과 담배를 전매하고 화투를 보급하여 우리 청년들의 정신을 황폐케 하는 야만적 정책을 실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편을 보급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몸과 영혼을 망치는 정책을 폈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인들 사이에 아편이 확산되는 것을 직시하고 한일병탄이 되기 바로 전해인 1909년에 샤록스(A.M.Sharrocks), 휫팅(H.C.Whiting), 어드만(Walter C.Erdman)으로 하여금 위원회를 조직케 하여 아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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