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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시즘 드라마·영화, 왜 기독교 목사 아닌 가톨릭 신부들만 등장하나

기독일보

입력 Nov 12, 2018 06:50 A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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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드라마 ‘손 the Guest’ (下)

성서의 축귀 사역을 모티프로 선정한 드라마, <손 the Guest>

성서의 축귀 사역을 모티프로 선정한 드라마, <손 the Guest>

성서적 축귀 사역: 엑소시즘에 대한 교회의 정서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OCN 드라마 '손 the Guest'를 비롯한 엑소시즘과 구마 의식, 성경적 축귀 사역 등에 대해 분석합니다. 최근 국내 대중문화계에서는 '손 the Guest'뿐 아니라 영화 <검은 사제들>, <곡성> 등 엑소시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오는 24일부터는 OCN에서 의학드라마와 엑소시즘이 결합한 주말 드라마 <프리스트>도 시작될 예정인데, 이들 모두는 가톨릭 사제(신부)들을 등장시키고 있어 그 유래와 효과에 대한 분석을 담았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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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과 구마 의식: 칼빈이 생각한 '말씀에 따르는 이적'

구마 의식에 대한 개신교회 전반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그 역사적 사정을 살펴야 한다. 개신교회의 시작을 연 종교개혁가들, 특히 개혁교회의 수장이었던 신학자이자 목회자 칼빈은 종교개혁 시작 당시부터 가톨릭교회가 구마 의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시행하고 있었는지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대표저서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 기독교의 초월적 이적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서문은 그가 당대 프랑스 군주였던 프란시스 1세에게 바치는 헌사로서, 종교개혁이 성서적으로 온당한 것임을 변증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이 서문에서 칼빈은 성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이적과 그에 대한 칼빈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들(종교개혁에 적대적인 자들, 주로 가톨릭 성직자들)은 우리에게 이적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미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진리로 확증하신 바로 그 복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이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확증할 수 있다는 이상한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이적이란, 원래는 잘 안정되었던 마음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경박하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

만일 이적의 정당한 목적과 그 효용을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들의 이 헛된 생각들은 한층 더 과장되었을 것입니다(기독교 강요 제1권,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 제3장)."

이 부분만을 두고 본다면, 칼빈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진술 때문에, 훗날 개혁주의 신학계에서는 한때 은사종료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런 견해는 주로 19세기 구 프린스턴 학파 장로교 신학자들(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완결된 성서가 주어진 오늘날에는 어떠한 초자연적 이적도 필요치 않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그 신학적 근거로 위에 인용된 칼빈의 진술을 제시했다.

손 the Guest
▲종교개혁자 칼빈(1509-1564).

여기까지만 본다면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입장은 구마 의식을 비롯한 모든 이적을 거짓 이적 혹은 '마귀의 궤계' 정도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위에 제시된 인용문에 담긴 칼빈의 진술 의도 가운데 한 쪽만을 바라본 데서 나온 오해라 할 수 있다. 위의 진술에 담긴 칼빈의 의도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진술을 살펴보아야 한다.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만 예정되어 있는 이 표적과 기사들을 거짓을 확증하는 데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의 말대로, 이적보다 우위인 이 교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검토되며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줄로 압니다.

그것이 확증되면,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건전한 교리의 증표는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는 것(요 7:18, 8:50)입니다(기독교 강요 제1권,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 제3장)."

이처럼 이어지는 진술에서 칼빈은 당대 가톨릭교회가 일부 거짓된 교리들을 지지하기 위해 초자연적 이적을 이용한다는 점을 지목하고 있다. 또 온전한 성서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이적들은 여전히 '예정되어 있는' 상황이며, 따라서 성서의 말씀이 온전히 검토되기만 한다면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칼빈은 모든 은사나 이적에 대한 종료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당대 일부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던 은사 혹은 이적을 지목해 그것들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구 프린스턴 학파 장로교 신학자들은 칼빈이 모든 은사와 이적의 종료를 주장했다고 해석한 것일까? 여기에는 핫지나 워필드 등의 신학자들이 한창 활동하던 19세기 중후반 당시 학계의 지배적 조류였던 근대주의적, 과학주의적 사고가 일부 관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구 프린스턴 학파 신학자들은 실상 칼빈이 원래 진술하려 했던 의도를 자신들의 학문적, 문화적 동향에 맞춰 다소 편협하게 해석했던 것이다.

일단 <기독교 강요>의 진술로 볼 때, 칼빈이 종교개혁기 당대의 어떤 이적들, 특히 가톨릭교회가 행한다고 하는 거짓 이적들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칼빈이 지목한 이 거짓 이적들 중 당대 가톨릭 구마사제들이 활발히 행하던 구마 의식도 포함돼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한 역사적-교회사적 이유가 존재한다.

손 the Guest
▲구 프린스턴 학파 장로교 신학자 찰스 핫지(왼쪽)와 벤자민 워필드.

◈도용된 구마의식: 면죄부 판매를 위한 거짓 이적

면죄부 판매가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가톨릭교회가 이 면죄부 판매를 위해 세운 전략을 구체적으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통상 면죄부 판매가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역사 기록이나 당대 면죄부 판매에 매진했던 사제들의 행각을 비판한 문학 작품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대다수의 경우 이들은 설교와 이적을 통해 회중의 마음을 매료시킨 뒤 면죄부를 판매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소설인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그리고 실제 마르틴 루터와 대립각을 세운 바 있던 면죄부 판매사 요한 테첼(Johann Tetzel) 등의 설교 기록을 살펴보면, 당대 면죄부 판매사들은 감동적인 설교와 함께 자주 회중 앞에서 초자연적 이적을 선보이며 면죄부 판매를 권유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에는 면죄부 판매사가 어떻게 구마 의식을 통해 면죄부 판매를 성사시키는지 자세히 기록돼 있어 흥미롭다. 소설 내용 가운데 면죄부 판매사는 면죄부의 효력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진행한다. 설교 중 성당 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면죄부는 거짓이라며 면죄부 판매사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손 the Guest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로 인정받는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 그의 행운과 불운>의 한 장면.

그러다 이 신자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귀신들린 증상을 보이며 쓰러지고, 면죄부 판매사는 그 자리에서 구마 의식을 행하여 그를 제정신으로 회복시킨다. 그 자리에서 면죄부 판매사를 비난했던 신자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면죄부가 참으로 죄를 사해주는 증서라고 고백한다. 이에 신자들은 의심하던 마음을 모두 버버리 너나할 것 없이 면죄부를 사들인다.

주인공 라사리요는 이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나서, 나중에 여관에서 면죄부 판매사와 귀신들린 행세를 했던 신자가 서로 돈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본다. 애초 귀신들림과 구마 의식은 모두 면죄부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단지 소설 속 허구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은 스페인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로서, 훗날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 등에게 깊은 영향을 준 작품이다. 즉 이 작품 속 이야기들은 당시 실제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루터와 칼빈 등 16세기 중반 종교개혁을 이끌던 이들은 이런 현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성장해온 이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성경의 축귀 사역이 이교적 오컬티즘과 결합된 초혼의식으로 변질된 것도 보아온 이들이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에게 구마 의식이란 조작된 사기극 아니면 신접한 자들의 이교적 주술 정도로 각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서는 이후 축귀 사역에 대한 개신교회의 정서와 태도를 결정짓는다. 대중문화계에서조차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마의식 혹은 축귀 사역과 관련된 콘텐츠에 개신교 목회자가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검은 사제들>, <곡성>, <손 the Guest> 등 어디에도 개신교 목회자가 등장해 축귀 사역을 행하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손 the Guest
▲구마의식을 다룬 영화 <검은 사제들>. 축귀 사역을 모티프로 삼는 대중문화 콘텐츠에는 개신교 목회자가 아닌 가톨릭 사제가 공식처럼 등장한다.

가톨릭교회의 사기극과 이교도들의 초혼 의식에 참예하지 않으려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당대의 구마의식이나 초혼의식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나머지, 성서에 약속되어 있는 축귀 사역의 실현조차 달갑지 않게 여긴 점이다.

과연 칼빈이 성서적으로 온전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 체험한 축귀 사역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졌을까? 일단의 경계심은 가졌겠으나, 그것이 평소 성서의 말씀에 의거한 참된 신앙을 가진 목회자나 신자가 체험한 것임을 확인했다면 결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서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됐다고 생각(<기독교 강요> 제1권 제7장 1절)"하던 그가, 성서에 기록되고 약속된 사역의 실현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다고 하는 것은 칼빈의 성경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가톨릭교회에서만큼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개신교 내 교단들 가운데서도 목회자들이 간혹 축귀 사역을 행한 사례들이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와 달리 개신교회는 전반적으로 교회 내에서의 축귀 사역에 대해 여전히 탐탁치 않은 태도를 보인다.

이는 종교개혁기 당시 개신교회의 역사적-교회사적 정황을 숙지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오해 때문이기도 하고,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성서적 신앙과 무관하게 축귀 사역의 현상적 측면에만 치우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검은 사제들>이나 <손 the Guest>에서와 같이 무속과 협업하는 구마 의식은 당연히 거부돼야 마땅하다. 무당이나 박수 등 신접한 자들의 초혼의식이 귀신이나 악령을 힘입는 것이라면, 성서의 축귀 사역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과 악령을 쫓아내는 일이라 볼 수 있다.

프리스트 손 the guest
▲오는 24일부터 시작되는 메디컬 + 엑소시즘 OCN 드라마 '프리스트'.

따라서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무속인과 개신교 목회자의 협업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 동시에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귀신들려 고통받는 이의 문제 앞에서는 유독 가톨릭 사제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만 반복적으로 재연되는 대중문화 속 클리셰에 대해, 개신교 신앙인들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는 있을 듯하다.

귀신들림과 축귀 사역이라는 영적 투쟁에 개신교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 이는 개신교회가 일정부분 자처한 면도 있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정황을 성서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깊이 숙고해서 이해하기보다, 그들의 진술을 무반성적으로 해석해 결국 성서가 약속한, 그리고 오늘날 일부 신실한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여전히 체험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부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깊게 반성하는 새로운 신학적·목회적 해석이 시도되지 않는 한, 귀신들림을 모티프 삼은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개신교인들의 활약을 목격하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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