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1) 동물 학대 문제

네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동물을 존중하지 않은 기독교 분파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사실은 동물 학대가 성경적 뒷받침을 받는 견해는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2) 동물을 학대한 기독교 교파

동물을 학대한 기독교인들은 네덜란드의 그리스도인들이 네덜란드의 "검은 스타킹 교회"(zwarte-kousenkerken, "black stockings churches")라고 불렀던 네덜란드 북부의 일부 보수파 교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가장 철저한 정통주의자라고 여겼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물은 영혼이 없고 천국에 가지 않는다고 여겨 동물을 잔인하게 다루는 전통이 있었으며 동물을 때리고 걷어차기도 했습니다. 천국에 가지 못할 동물들을 친절하게 다룰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3) 동물에 대한 성경적 오해

이 같은 일부 기독교 분파의 극단적 동물학대는 천상의 것은 귀하고 세상은 타락하고 더러운 세상이라는 이원론적 그릇된 태도에서 온 것입니다. 즉 기독교 생태 환경에 대해 바른 성경적 이해가 부족한 오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정상적 칼빈주의자들은 동물을 결코 학대하지 않으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인간만 영혼이 있나?(사람의 영혼, 동물의 영혼)

유물론자들은 사람이나 동물을 모두 오직 물질적 존재로 봅니다. 이것을 일원론이라고 부릅니다(포이에르바하, 공산주의 등). 즉 영이나 혼은 단지 인간이나 동물의 생명을 지칭하는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이지요. 그래서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영혼이 존재함을 말하며 심지어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이나 혼이 존재한다고 증거합니다(창 35:18; 시 31:5; 눅 23:43; 행 7:59; 계 6:9). 그럼 성경에서 "영"이나 "영혼"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혼(soul, nephesh, Psyche)에 대해 -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보면 이 단어는 우리말 영(the spirit/히, ruach/헬, pneuma)이 아니고 "혼"(the soul/히, nephesh/헬, Psyche)의 번역입니다. 즉 직역하면 인간이 "살아있는 (영)혼(존재)"이 되었다("네페쉬 하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영(spirit)이라고 번역하는 그 단어가 아니고 영혼(네페쉬)의 번역인 것이지요. 이 영혼(네페쉬)은 성경에 755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 사람, 동물 모두에게 적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전도서 3장 21절에서 짐승에 적용됩니다. 특별히 동물 창조 때(창 1:22, 21, 24)에도 결정적으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이 영혼이라는 단어는 우리 성경에 영혼 뿐 아니라 생명, 목구멍, 바람, 욕망, 갈망, 인격 등 100여 가지 다른 단어로 사용되고 심지어는 "시체"(민 6:6)에도 사용된 단어였습니다.

계시록 16장 3절에 보면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때 "생물"에 사용된 단어도 바로 "프쉬케(생물, 목숨)였습니다. 바다 가운데 인간 생물만 모여 있는 장면은 아주 이상한 장면이지요. 인간 생물만 아니라 모든 생물(프쉬케)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 단어(네페쉬)를 사용함 에 있어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인간이나 짐승들도 모두 당연히 (영)혼(네페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네페쉬"를 소유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둘째 영(the spirit, ruach, pneuma)에 대해 - 구약에 389번 나오는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136번)을 나타내는 말이기는 하나 인간이나 동물(129번)에게도 적용된 단어입니다. 이 말의 기본 뜻은 "바람"이나 "호흡"에서 온 단어이지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를 말하기도 하는 이 말도 아주 복잡합니다. 생명, 숨, 공기의 흐름, 바람, 풍채, 싸움, 동물의 삶, 유령, 정신, 영혼, 마음, 기억, 이성, 분노가 다 영(루아흐)입니다. 네페쉬처럼 이 단어도 그 쓰임새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spirit, 루아흐)과 (영)혼(soul, 네페쉬)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사 57:15; 단 5:20). 예를 들면, 내가 영혼(soul)을 가진 생명인데 영(spirit)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분명 있습니다. 영혼은 육신적 감각이 있어서 굶주리기도 하고 목마르기도 하지만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은 슬퍼하고 근심하며(창 26:35), 겸비하고 가난하기도 하며(마5:3), 생각하고(사 27:24; 욥 20:3), 기억하기도 합니다(시 77:6). 영어의 영(spirit)은 오늘날 바람, 숨, 마음, 능력, 재능, 힘 등 너무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성경적 표현과는 조금 다르게 쓰임새가 다양화 되어 있다고 보여 집니다.

이렇게 "영"(spirit)과 "(영)혼"(soul)이라는 두 단어에 대해 많은 기독교 문헌은 종종 동의어처럼 쓰는 가하면, 구별(히 4:12)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동물들도 이 둘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인간은 육체만 가지고 보면 "흙"(Humus)에 불과한 존재라 동물과 그리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모든 것(생명과 자연) 앞에 교만하거나 잘난 척하면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다른 생명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과 동물은 당연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동물과 조금 달리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흙"이요 "생령"이라는 점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요.

5) 동물 보호인가, 동물 정복인가?

창조와 구속의 종교인 기독교는 당연히 모든 생명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모든 생명은 인류와 함께 창조 주간에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창 1:28). 그런데 땅을 정복하라는 용어는 조금 특이하다. '정복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카바쉬(kabash)는 군사 용어입니다. 전쟁은 잔인합니다. 따라서 이 '정복하다'는 의미에는 '짓밟다, 약탈하다, 굴복시키다' 등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이 정복한 나라들에서 노략한 은금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삼하 8:11). 그만큼 강하게 복종 시키는 정복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정복하다'는 구절을 동물에 잘못 적용하는 누(累)를 가끔 범합니다. 이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구절이 쓰여 진 창세기 1장은 창조 주간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 때, 세상과 생물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아직 범죄 하지도 않았던 시기였음을 알려줍니다. 아직 땅은 저주 받지도 않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땀 흘려 땅을 경작할 필요도 없었고 사람은 육식을 하지도 않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땅의 짐승들을 잔인하게 해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땅을 정복하라'는 이 용어는 땅이나 동물과의 전쟁 선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지하고 있는 땅에 인격성을 부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의지가 반영된 구절로 보입니다.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우리의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근거"(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에서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을 역사적 기독교에 찾으려 합니다. 목사였던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성경 말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8절 말씀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해석과 오해가 땅에 대한 마구잡이식 지나친 개발과 그에 따른 공해와 생태계 파괴로 나타났다고 보여 집니다. 무생물인 땅에 대해 군사 용어인 '정복'하라는 강한 어휘를 사용하여 명령을 내릴 만큼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에 대한 많은 권리와 소유권을 주신 것은 분명합니다.

즉 인간은 그것을 복종시키고 관리할 많은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받았습니다. 인간은 땅의 청지기가 된 것이지요. 인간은 땅에 대한 이 문화 명령을 군인처럼 철저히 수행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14:23). 이것은 땅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당연히 적용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군사와 같은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믿음과 선한 양심과 지혜로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땅과 동물은 다릅니다. 동물은 늘 인간의 동반자였습니다. 노아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방주에 기거할 때도 동반자였고 하나님이 권념할 때에 노아 가족과 동물들은 방주에서 함께 나왔습니다(창 8: 15-19). 창조된 모든 생명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질서와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정복자가 아닌 단지 청지기일 뿐이지요. 청지기는 성경에 계시된 창조의 질서를 따라 선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요. 본 회퍼가 창세기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 성경을 인용하여 하와를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 말한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6) 동물 사랑의 종교, 기독교

기독교는 결코 동물을 무시하거나 동물에게 무례한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도 아닙니다. 청지기일 뿐이지요.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욘 4:11)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롬 8:18-22).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합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사 65:17, 계 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사 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지요.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 상호 연결, 지속 가능한 창조성,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 종으로서의 섬김, 청지기,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 정의라는 8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당연히 동물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