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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목사의 한국교회사] 한국 교회의 수난 (V)

기독일보 news@christianitydaily.com

입력 Sep 06, 2018 04:53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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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목사의 한국교회사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Photo : )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일제 통치 35년을 통해 일본 교회가 자기 나라의 한국 식민화 정책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어떤 태도를 지녔느냐 하는 문제는 같은 신앙인인 우리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소위 ‘민족주의와 기독교’라는 큰 틀 속에서 가해자의 입장에 선 일본 교회와 피해자 입장에 선 조선 교회와의 관계라는 특별한 처지에서 무척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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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기독교

우리는 일본 교회가 일제의 아시아 식민 정책을 뒷받침하였고,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자기 나라 정책에 충실한 주구(走狗) 노릇을 한 사실에서 민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기독교의 참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치스 정권을 지지했던 독일 교회와 더불어 일본 교회의 행태는 왜곡된 역사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일부 양심 있는 일본의 기독자들이 일제의 정책을 비판했고 신사참배나 천황숭배를 거부한 사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개인이나 교회가 이에 동참한 사실에서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기독자들의 오류를 엿볼 수 있다.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이식하려는 시도

일본 교회는 조선 교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일본 교회에 흡수시킬 계획을 세워 의도적으로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조선에 이식시킬 것을 획책하였다. 한일병탄이 되던 1910년 일본 조합교회 제26차 연차대회(年次大會)는 조선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의하였다. 조합교회에서 한국 선교에 앞장선 이는 도뢰상길(渡瀨常吉)이다. 그는 1899년 서울에 경성학당(京城學堂)을 세워 한국 아동교육에 힘쓰다 조합교회 선교가 시작되자 이 일에 치중하였다. 1911년 서울에 한양(漢陽)교회, 평양에 기성(基城)교회를 설립하였고, 1912년에는 전국에 16개 교회가 일본의 조합교회에 가입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교회에 비밀리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은밀히 이 교회 확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총독부는 한일병탄 직후 이 교회에 64원을 비밀리에 보조하였고, 그 후 매년 6천 원을 1921년까지 보조하다 3·1 독립운동 후 끊어 버렸다. 이에 따라 조합교회의 한국전도 사업도 끝을 맺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그 원인에 대해 한국에 있던 일본인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을 비난하고 독립운동은 정당한 행위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 일제 군대나 경찰의 만행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선 회중교회의 창설

3·1 독립운동을 통해 한국민의 독립의지와 일제에 대한 저항을 확인한 후 1921년 9월 한국 교회의 일본 조합교회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일본 조합교회로부터 자치를 선언하고 조선 회중교회(會衆敎會)라는 이름으로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 다음 달 창립총회가 열려 회장에 유일선(柳一宣), 부회장에 차학연(車學淵)을 선출하고, 이 교회의 신조를 공포하였다. 이 신조는 ‘자율적 신앙에 충실을 도모하여 진보적 사상을 고조하되 인격의 존양(存養)과 사회의 혁신을 기한다.’라 하여 기독교적 요소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이 교회는 또 자제단(自制團)이란 것을 만들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억제 하려는 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가입하는 단원이 없자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교회 자체도 유명무실한 교회로 전락되어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한국인들이 배제되고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조합교회는 해방이 될 때까지 명맥만 유지하다 모든 건물을 장로교회에 넘겨주고 일본으로 건너감으로써 그들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민족의 수탈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편협한 민족교회의 오도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인류 보편의 행복과 정의 실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기독교 근본 진리를 수호하고 실행하는 데서 비로소 기독교회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는 진리를 일본 조합교회가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행한 모습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분파 운동의 전개

이런 일제의 간교한 교회 분열과 파쇄 작전 와중에 한국 교회 내에서는 서서히 분파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최초로 불거진 것이 최중진의 자유교회 및 기타 자유교회운동이다. 교회가 한창 부흥하고 성장할 때 언제나 교회 안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 법이다. 이제 겨우 노회를 창립하고 총회도 창립하지 못한 때에 교회 안에서는 벌써 분열의 비극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밖으로는 일제의 교회에 대한 억압이 가일층 증가되고 있어 교회의 온 힘을 결집해서 항일 대열에 서도 부족할 지경에, 약한 교회 안에서 사소한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는 불행한 사태가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최초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난 곳은 전북 대리회(代理會)지역으로, 1910년 최중진(崔重珍) 목사가 장로교회를 탈퇴하여 자유교회(自由敎會)를 설립해 나가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최중진은 호남 지역의 제1호 목사로 이 지역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1910년 1월 전주에서 모이는 전라 대리회에 다섯 가지 요구를 하면서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독립하여 자주(自主)교회를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최중진이 제출한 다섯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원입교인에 대한 현 교회의 규율이 엄격하니 이를 폐지하고 학습인을 세워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할 것. 2. 군산 지방으로 편입시킨 부안 지방은 나의 지역에 되돌려 줄 것과 무장도 가능하면 나에게 맡겨줄 것(일은 믿음과 역량대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함). 3. 나의 지역에 중등학교 하나를 세워 교육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 4. 교회마다 상구위원 2인씩을 두어 교회 이름으로 가난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구제토록 할 것. 5. 집 한 채를 사주어 선교하는 일에 재정적 어려움이 없도록 할 것등이었다.

전라 대리회가 이런 최중진의 제의를 거부하자 그는 전라 대리회장 선교사 불(W.F.Bull) 앞으로 편지를 보내 ‘대한예수교자유회 목사’라 칭하면서 교회를 갈라 자유교회임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교회를 분열시킨 이유는 그가 내세운 이유보다 선교사들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에 선교부가 없고, 선교부가 경영하는 학교나 병원이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 선교사들이 받는 월급과 한국인 목사들이 받는 월급에 지나치게 편차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최중진은 결국 교회로부터 분열하여 독립교회를 만들어 나갔는데, 그 교회에서는 술 마시는 자, 첩 있는 자 등을 가리지 않고 회원으로 받아 교회의 도덕적 기준을 여지없이 추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는 군산, 광주 지역에까지 그 손을 뻗쳐 20여 개의 그룹을 이끌고 나갔다. 그는 사기죄로 체포되어 2년간 감옥살이를 한 후 일본 회중교회에서 많은 월급을 주자 그곳으로 합류하여 버리고 말았다.

자유교회운동의 쇠락

최중진의 자유교회는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립정신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순전히 그 지역 선교사들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동기가 되어 비롯되었다. 그의 자유교회는 결국 교회와 민족을 저버리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결국 목회를 포기하고 노동 운동과 평형운동(平衡運動:백정들의 차별 금지 운동)을 일으켜 이 일에 전념하였다.

1911년 대리회가 독노회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자유교회로 나간 교회들이 다시 본 교회로 돌아왔고 자유교회는 점차 없어진다고 보고하였다. 1911년 평북 대리회 지역의 의주군(義州郡) 노북(盧北)교회 영수 김원유(金元瑜)와 강계(江界)교회의 장로 차학연(車學淵)이 선교사의 처사에 불복하고 ‘자유교회’를 분립하자 수백 명의 교인들이 이에 동조하여 따라나갔다. 교회에 주는 피해가 극심하므로 양전백(梁甸伯) 목사가 권면하고 종용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자유교회운동은 그 외에도 1923년 전남 장성군 월평(月坪)교회 백용기(白容基)의 ‘자치교,’ 충북 보은(報恩)의 이재식(李再植) 전도사, 경기도 고양(高陽)의 이은우(李恩雨), 평양의 이규찬(李奎燦)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생되었으나 모두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자유주의 신학적 설교의 등장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을 부르짖고 나선 사람은 황해도 봉산(鳳山) 지방의 김장호(金庄鎬) 목사였다. 김장호는 190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쿤즈(W.Koons)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190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7회로 졸업했다. 그리고 그 해 6월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2월부터 봉산군 산수면 신원(新院)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김장호는 설교를 하면서 성경을 자유주의신학의 주장에 따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을 갈대밭 사이를 건넌 것으로, 예수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군중들이 도시락을 싸온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1916년 6월 황해노회는 그의 성경해석이 불합리하다고 경고하고 총대 자격을 박탈하였다.

1918년 7월 노회는 김장호가 ‘성경진리를 위반하여 교인을 인도함을 인하여 6개월 간 휴직처분’시키고 선교사 헌트로 신원교회를 돌보게 한다는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김장호가 노회의 결의에 따르지 아니하고 계속 목회를 하자 노회는 12월에 모인 15회 정기회에서 노회 권고에 대한 불복을 이유로 김장호의 목사직을 박탈하였고, 1923년 총회는 노회의 치리를 인정하여 기정사실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회의 결의에 불복하면서 노회 탈퇴를 선언하였다. 또한 신원교회 경영 신흥학교에서 곽기호(郭圻浩) 외 13명과 함께 ‘정신(正信)의 교회,’ ‘동양인의 교회,’ ‘국민의 교회’를 표방하면서 ‘조선기독교회’ 창립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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