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Photo : ) ▲이효준 장로.

 

'진보의 영원한 등대', '노동운동의 큰 별'로 불리며, 높은 인지도와 대중성으로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는 정치인이었던 노회찬 의원. 하지만, 2016년 총선을 앞두고 경제적 공진화 모임에게 불법정치 자금을 수수한 의혹이 드루킹 특검을 통해 제기되면서, 그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원내대표 방미 등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귀국한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결국 7월 23일 노모가 계신 아파트에서 "돈은 받았지만,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조금 지난 이야기지만, 많은 약자들과 노동자들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만이 옳은 처사였을까요? 자살 대신 떳떳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더라면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러다 대한민국은 'OECD 자살 1위국'이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자살한 사람을 영웅시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혹 사춘기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본받을까 심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자살을 통해 모든 것들을 해결하려 하거나, 모든 것을 자신이 안고 가겠다거나 덮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 옳은 선택이 아닙니다. 후손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살보다 더 나은 방법을 모색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무척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금전을 맡아 책임졌던 가룟 유다 역시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지금까지 불명예 제자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금전을 맡은 사명자라면 꽤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인물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맡은 임무를 성실히 정직하게 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재정을 오래도록 맡아 담당하면서, 초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탄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본질을 망각하게 됐습니다. 결국 우려대로 세상 사람들이 피하여 도망치듯 자살을 선택하는 비극적 마무리를 맞았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분들의 애로사항이야 필자 역시 말하지 않아도 그 심정을 잘 헤아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중 재정을 맡아 담당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시험에 드는 일이 허다하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재정 업무를 담당해 보신 분들이라면 다 아실 것입니다.

오늘날 담임목사나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힘 있는 장로의 정직하지 못한 재정 관리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교회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기란 참으로 힘에 부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지 못할 때는 분명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선발하셔서 하루 24시간을 거의 함께 생활했던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이러한 비리가 발생했는데, 하물며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비리들이 있을까요?

저울도 공평한 저울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업무는 공명정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하려고 하는 모순 때문에 늘 분쟁이 도사리며, 성도 간에 서로가 신뢰하지 못하고 믿지 못해 시기하며, 심지어 모함까지 일삼는 등, 성도로서 감히 할 수 없는 나쁜 일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주님께 더욱 실망을 시켜드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회는 있습니다. 스승을 은 30냥을 받고 팔아먹은 가룟 유댜는, 스승께서 십자가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가슴 깊이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을 선택을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 자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어찌 보면 가룟 유다는 '양심 있는' 세상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자살을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계산이 빠릅니다. 계산이 너무 빠르다 보니, 극단적인 선택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자살을 마음먹었다 해도, 그 전에 잠시 숨을 고르며 나의 잘못과 앞으로의 희망적인 계획을 잠시나마 생각해 봤더라면, 그리 급하게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보다 주님으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던 베드로는, 오히려 가룟 유다보다 더 못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베드로 역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 깊은 후회와 더불어 깊은 회개를 함으로써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고, 훗날 주님께서 귀히 사용하는 성 베드로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급한 성격을 지닌 한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을 잘 한 덕분에 오히려 주님의 귀한 제자로 쓰임을 받았던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베드로처럼 다시 한 번 심사숙고했더라면, 비록 주님을 팔았던 인물이지만 훗날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제자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참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합니다.

노회찬 의원 역시 노모도 살아계시는데다, 그를 좋아하는 많은 약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더라면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은 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 마음을 괴롭힙니다.

내가 추구하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해서, 그리고 나의 명예가 훼손됐다 해서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 추구하고 목적했던 일은 누가 달성하겠습니까? 잠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겼더라도, 그것은 순간입니다. 내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 잘못이 있으면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다시금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반드시 명예회복은 물론, 내가 원하고 바라던 선한 일까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국가와 백성의 기밀이 누출되거나,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적에게 붙잡혀 조직원들에게 누를 끼친다거나 조직의 와해를 막기 위해,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배신하는 일을 막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신뢰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한 번쯤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땅에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 흉악한 이들의 고문을 감내하며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를 감당한 많은 순교자들의 거룩한 자세는 신앙인들이 늘 가슴에 담고 본받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정치가나 사업가들 중에는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무슨 사고가 터지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분들이 있어 실로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오죽 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는 일말의 생각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아마 자살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효준 은퇴장로